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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면 무도회의 종장 - 김영희 특파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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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상호방위조약으로, 개전 위한 전열정비>
중동전쟁이 터지기 1주일 전인 5월 30일 「요르단」 왕 「후세인」이 「카이로」로 날아와서 「나세르」 와 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대 「이스라엘」 「성전」을 위한 「아랍」의 전열 정비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공화파와, 군주파, 「새것」 「낡은 것」의 이질분자가 결합한 이 조약으로 「아랍」세계는 「적전대동맹」의 준비를 완료한 셈이었고 「나세르」와 「후세인」의 극적인 포옹이 결과적으로 개전을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패전의 폐허에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의 가면무도회였던 것 같다. 전선에 패색이 짙어지자 「후세인」이 먼저 가면을 벗었다. 항복직전 까지만 해도 앞장서서 미·영 개입설을 스스로 부인했다. 그리고는 미·영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왕위의 안전보장에 필사적인 힘을 쏟고 있다.

<전전에의 뒷걸음, 영도권 쟁탈전화>
62년 「예멘」 「쿠데타」 이래 「사우디아라비아」 의 「파이잘」 왕과 함께 「이슬람」 동맹을 구상하면서 나세르의 공화파 혁신세력에 맞서온 「후세인」이 별안간 「아랍」공화국과의 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아카바」만의 봉쇄가 「요르단」에 미친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이었다고 알려졌다. 때늦기 전에 「아랍」의 전열에 가담하지 않는 한 「아랍」·「이스라엘」 개전과 함께 「요르단」에서는 반「후세인」, 친 「나세르」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쿠웨이트」 「이라크」 「알제리」의 직접 또는 간접참전도 저마다의 이기적인 타산에서 결행되었던 것이고 보면 대 「이스라엘」 열전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지금 「아랍」 세계는 다시 전전의 상호 반목·영도권의 쟁탈전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비겁한 보수주의」, 「요르단」 불신 계속>
「후세인」왕은 「이스라엘」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된 「팔레스타인」 해방군에 무기를 공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 무기가 반 「후세인」 「쿠데타」 에 사용될까 두려워해서였다. 이러한 「후세인」은 「시리아」로부터 「비겁한 보수주의자」로 비난을 받았다. 전쟁 중 「가면무도회」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시리아」는 「후세인」 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나세르」 자신은 「아랍」세계의 보수·급진양파로부터 비난·공격을 받은 끝에 결국 「시리아」의 급진파에 끌려 「전의실조」인 채 좌선회를 하여 전쟁에 말려들었지만 「나세르」 의 좌선회 자체가 어느 편이냐 하면 「시리아」의 호전성 견제를 위한 가면이었던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아랍」공화국과 「시리아」관계는 지금부터 재조정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부메디엔」의 속셈, 「아랍」새 지도자로>
이번 전쟁을 전후하여 가장 활발한 외교전을 벌여온 것은 「알제리」 대통령 「부메디엔」 인데 그의 꿈은 「나세르」가 종이호랑이로 격하된 공백기를 뚫고 「아랍」의 새로운 영도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라크」의 「아레프」 대통령은 3년 전 국내의 반 「나세르」감정의 무마를 위해 친 「나세르」각료를 6명이나 추방한 바 있는데 이제 다시 전 중에 취한 「나세르」와의 밀서에서 일보후퇴 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운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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