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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디자인은 없다, 항상 다음이 최고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이언 칼럼 디자인 총괄이 서울 한남동 전시장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2인승 스포츠 컨버터블 XKR의 곁에 서 있다. 조용철 기자

영국의 프리미엄 브랜드 재규어. 귀족적(엘레강스)인 디자인과 모터 스포츠의 전통을 이어받은 ‘잘 달리는 차’로 유명하다. 경쟁차인 독일의 벤츠·BMW·아우디와 비교해 보면 한눈에 재규어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알아볼 수 있다.

 이언 칼럼(59)은 자동차 업계에서 현존하는 최장수(15년째) ‘디자인 총괄’이다. 디자이너들이 뽑는 영향력 있는 사람에 늘 제일 먼저 손꼽힌다. 그는 1990년대 영국 스포츠카인 애스턴 마틴의 디자인을 현대화해 명성을 얻었다. 재규어가 포드 그룹에 속해 있을 때 동생인 머리 칼럼과 함께 일해 형제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현재 머리는 북미 포드의 디자인 총괄이다. 이달 초 서울모터쇼 강연차 방한한 칼럼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는 지독한 ‘워커홀릭(일 중독)’이다. 제때 퇴근하는 경우가 없다. 밤샘 작업을 수도 없이 한다. 여행을 가서도 스케치를 한다. 그렇다고 무절제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디자인의 기본이라는 스케치다. 그는 “학력 좋은 디자이너가 스케치를 잘 못하는 우스운 일도 다 봤다”고 말할 정도다.

 재규어 디자인에 대해선 ‘단순·순수·우아함’이라고 정의한다. 디자인을 최대한 단순하게 하고 인테리어 소재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는 “나무나 가죽 같은 전통적인 천연 소재는 제맛을 살려내는 게 중요하다”며 “요란하거나 천박하게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대신 디자인은 현대적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절제미도 강조한다. 아무리 좋은 소재라도 “때로는 덜 쓰는 게 더 나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한국 학생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일단 많이 그려라. 일류 자동차 디자이너가 꿈이라면서 드로잉을 못하면 안 된다. 최고가 되려면 10%의 재능은 있어야 하지만 많이 그리고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노력이 90%라고 본다. 자신의 작품에 비판적일 수 있어야 다음 디자인이 더 좋아진다. 최고의 디자인은 없다. 항상 다음이 최고다.”
 
재규어 특징은 단순·순수·우아함
1990년 부도 위기의 재규어를 미국 포드가 인수했다. 2007년 포드가 금융위기에 몰리면서 재규어는 2008년 인도 타타그룹 품에 안긴다. ‘재규어에 인도 디자인풍이 가미됐나’라고 묻자 ‘없다’고 잘라 말한다. 칼럼은 “예전 포드와 함께 일할 때보다 지금이 더 자유롭다. 타타 회장은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자주 논의를 하지만 절대 본인의 아이디어를 강요하지 않는다. 영국 브랜드이니 늘 영국 자동차답게 만들라고 주문한다”고 덧붙였다. 재규어는 영국풍이어야 한다는 걸 인정해 준다는 얘기다.

 그는 재규어·포드·마쓰다에서 35년간 일하면서 업계의 판도 변화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러면서 경영적 안목도 생겼다. 그는 “회사가 잠깐 빛을 발하는 것보다 꾸준히 발전하는 지속 가능성과 친환경 효율성이 과제”라고 말한다.

드라이브 셀렉트

 “요즘 효율성은 단연 연비다. 우선 신차에 적용할 소재의 무게를 고려한다. 강철보다 30% 이상 비싸지만 가벼운 알루미늄을 차체에 가장 많이 쓰는 게 재규어다. 연비가 좋아질 뿐 아니라 재활용에도 유리하다. 조만간 알루미늄의 90% 이상 재활용이 가능해진다. 아울러 개발 단계부터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공기역학(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을 한다. 도면부터 공기역학을 고려해 수학적인 모델을 만든다. 그 다음 도면을 컴퓨터에 넣어 바람의 저항을 나타내는 계수(cd: Coefficient of Drag) 측정을 한다. 현재 목표는 0.27, 0.28로 매우 낮다. 3, 4년 전 평균 0.34, 0.35에 비하면 대폭 좋아졌다.”

 그는 공기역학 신봉론자다. 날렵한 재규어의 디자인도 여기서 나온다. 차 앞쪽에서 시작해서 공기의 흐름을 옆면·윗면 등 모든 부분에 적용한다. 측정 결과가 좋지 않으면 디테일한 디자인 요소를 추가해 개선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체 바닥도 중요하다. 차량 밑으로 흘러나가는 공기와 엔진룸을 통해 유입되는 공기를 별도로 관리한다. 차의 꼬리는 공기역학의 핵심이다.

 요즘 안전규제가 점점 강화된다. 지난해 유럽에서는 보행자와 충돌할 때 부상을 적게 하는 디자인을 요구하는 ‘보행자 보호법’이 도입됐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로 확대되는 추세다. 이런 규제는 디자이너를 어려움에 빠뜨린다. 공기역학을 고려하면 앞부분을 낮게 설계해야 하는데 보행자 보호법에 맞추려면 앞 부분이 더 높아져야 한다. 재규어는 이 규정을 맞추기 위해 보닛 안쪽에 보행자용 에어백을 설치해 스포티한 디자인을 지켜냈다.

 칼럼은 자동차 디자이너를 ‘최고의 직업’이라고 말한다. 대신 카 디자이너가 되려면 ‘자신과의 몇 가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케치를 통해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조언한다.

 “업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다. 친환경 규제나 안전 규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상상력을 키운 디자인에 도전하라. 해당 브랜드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야 한다. 브랜드의 상징과 철학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소비자에게 어떤 스토리를 들려줄 것인지 늘 고민하라. 기억할 점은 본인을 위해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다. 디자이너는 스토리텔러다. 모든 신차 디자인에는 스토리가 담겨있어야 한다. 무엇을 나타내려는지 설명하고 알 수 있어야 한다. 젊은 디자이너는 간과하기 쉽다. 다음으로 팀워크가 중요하다. 신차 디자인은 팀으로 일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현대차가 스카우트 제의? 그런 루머 영광”
칼럼은 줄곧 엘리트 코스를 달려왔다. 미국 패서디나 스쿨과 함께 자동차 디자이너의 양대 산실인 영국 런던의 왕립예술대학(RCA)을 나왔다. 그는 RCA를 ‘자동차 업계의 진입 통로’라고 말한다.

 “RCA에서의 2년간 공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다. 자동차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깨너머로 본 게 큰 도움이 됐다. 네트워킹은 단연 최고다. 어떤 사람들이 업계에서 일하고, 졸업할 때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누구와 연락을 해야 할지… 이런 거다.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RCA 유학을 권유하고 싶다. RCA를 후원하는 많은 기업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기업문화를 엿보고 학생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때로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러 방문하는 업체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디자이너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키울 수 있다. 디자인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현대·기아차는 폴크스바겐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 총괄로 스카우트해 성공을 거뒀다. 칼럼은 “실력이 없는 디자인 디렉터를 만나면 처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디자인 총괄은 한 기업의 성패를 가른다. 요즘은 더 그렇다. 소비자의 감성을 잘 잡아야 한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고 성능이 좋아도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타고 싶지 않다. 디자이너는 감성적인 환경을 만들어준다. 좋은 자동차 디자인은 보는 사람들 흥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해외 자동차 잡지에서는 ‘현대차에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그런 루머는 영광”이라며 “지금 재규어와 사랑에 빠져 아마 옮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대차에서 연봉 얼마를 제시할 것 같으냐”는 농담을 던졌다.

 재규어는 독일 브랜드와 경쟁한다. 칼럼은 “독일차들은 아주 탄탄한 수학적인 기반으로 만들어진 좋은 차”라며 “독일 브랜드가 좌뇌라면, 재규어는 우뇌라고 볼 수 있다. 재규어는 수학이나 기계적이기보다는 좀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이라고 설명했다. 운전자를 흥분시키는 감성 디자인을 위해 재규어는 기존 모델보다 차체를 작게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 신차는 항상 커져야 한다는 독일차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포인트다.
 
운전자가 007처럼 느끼게 만들어라
칼럼은 2008, 2009년에 중형 세단 XF, 대형 세단 XJ를 잇따라 발표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이 차를 보고 “재규어 이름만 빼고 전통적 디자인 요소를 다 바꿨다”며 놀라워했다. 동물 모양의 재규어 엠블럼이 없어진 것은 물론, 재규어만의 동그란 헤드램프도 사라졌다.

 “2007년 다시 재규어로 복귀해 느낀 점은 재규어가 오랫동안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세대에 타던 느낌이 났다. 60년대 나온 XJ는 당시 ‘매우 현대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 친구도 그때의 XJ를 보고 ‘재규어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 부분을 기억했다. 재규어의 현대적이고 혁명적인 가치를 다시 살려주고 싶었다. 21세기에 맞는 브랜드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올드(old)해 보이는 차를 만들 수는 없었다. 과거부터 재규어가 지켜온 가치는 ‘도전을 마다 않는 현대성’이다. XF는 61년산 마크Ⅱ(Mark Ⅱ)와 디자인에서 일맥상통한다. 좋은 비율과 심플한 라인, 우아하면서도 스포티한 선이 핵심이다. 시대에 맞지 않은 것을 시대에 맞춰 현대적으로 돌려놨다.”

 인테리어에는 원통형으로 솟아 오르는 드라이브 셀렉트 변속기를 세계 처음으로 도입했다. “인테리어에서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극적인 효과를 주는 것이다. 운전석에 앉았을 때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재미(fun)를 도입하려 했다. 시동을 걸면 드라이브 셀렉트가 튀어 올라오며 운전자를 반긴다. 사용하기도 편리하고, 실내가 깔끔해 보이고, 아름답고, 운전자를 미소 짓게 한다. 약간의 ‘007 제임스 본드’ 요소라고나 할까.”



이언 칼럼 1954년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출생. 글래스고대학에서 산업디자인 전공.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 자동차 디자인 석사. 79년 포드 디자이너로 출발해 TWR·애스턴 마틴·마쓰다에서 일했다. 99년 재규어 디자인 총괄을 맡았다. 유년 시절 자동차 딜러에게 신차 브로슈어를 요청해 방을 도배할 정도로 자동차 광이었다. 14살 때 재규어에 자신의 자동차 디자인을 보내, 격려의 답변을 받은 일화가 유명하다.

김태진 기자 tj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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