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폭음 일삼는다는 성공한 40대 사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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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 자수성가한 47세 사업가입니다. 제 고민은 폭음입니다. 음주로 간에 문제가 생겨 입원한 적이 있는데도 술을 끊는 게 쉽지 않습니다. 끊어야지, 하고 맘먹다가도 거래처 접대 때문에 한번 술자리를 가지면 그 다음부터 또 폭음을 하게 됩니다. 적당히 먹는 게 아니라 몇 주를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마십니다. 주변에선 “스트레스 탓”일 거라며 “술 말고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여자를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여자를 만나서도 술을 마신다는 겁니다. 여자랑 술 안 먹고 재미있게 놀아보려고 해도 아내한테 죄책감이 드는 탓인지 또 술을 먹습니다. 재미도 없고요. 술을 끊는 방법이 없을까요.

A 여러 계층의 성공한 분들이 클리닉에 많이 찾아옵니다. 삶에 뭔가 부족하다거나 결핍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고, 그에 따른 여러 심리적 증상을 겪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렇게 성공한 분의 심리적 고통은 결핍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성공한 사람이 이런 고통을 털어놓아도 주변 사람에게 공감을 받기 어렵다는 겁니다. 심지어 잘난 체하나라는 저항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통증의 밀도는 농축됩니다. 江南通新 독자 여러분은 이 남성의 사연을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비싼 술 맘껏 마실 수 있고, 부인 두고 딴 여자 만날 수 있다는 걸 자랑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혹시 드시진 않는지요. 성공한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감받을 기회가 적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엔 사연 주신 남성분의 경우 생존을 위해 폭주하다 보니 생존 시스템이 과열돼 불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상황 같습니다.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감성 노동을 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기 때문에 술 접대가 힘들고, 그게 폭주로 이어지는 겁니다. 술로 몸 안의 쾌락 시스템을 자극해 진통제를 내뿜게 하는 셈이지요.

 마음의 불안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거라서 술과 싸워서는 술을 줄일 수 없습니다. 굳은 의지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마음을 힐링(치유)할 수 있는 다른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감성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마 몇 달 정도는 의지로 금주를 한다 해도 또 어떤 자극이 와서 괴로움과 불안이 엄습하면 결국 술병에 손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다음 스스로 자책하고 주변에서 아무리 잔소리를 해봐야 술을 끊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와 폭음을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스트레스 클리닉을 찾은 성공한 시니어들에게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는지 물으면 대부분 잘 답을 못 합니다. “술로 푼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술은 즉각적으로 우리 몸의 쾌락 시스템을 자극해 보상을 해줍니다. 쾌락 시스템은 단기적 보상에는 강하나 장기적으로는 뇌를 더 지치게 해 결국 허무감을 증폭시킵니다. 자극이 강렬할수록 점점 내성도 강해지기 때문에 나중엔 공허함이 쓰나미처럼 크게 찾아옵니다.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다 보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감성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이 감성 스트레스를 잘 보듬어 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성공해도 성공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고요. 감성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엔 빠른 자극과 느린 자극이 있습니다. 술과 마약 같은 게 빠른 자극이죠.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강렬하나 내성이 있어 나중에 더 큰 허무함을 가져오거나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지요. 반면 느린 자극, 즉 자연과 사람을 감성적으로 즐기는 여유는 내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혀 평안을 줍니다.

 문제는 너무 바쁜 세상이다 보니 느린 자극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공한 정치인이 회의 도중에 스마트폰으로 여성의 누드 사진을 보는 것,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제 입장에선 느린 행복을 즐기지 못하고 빠른 자극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현대인의 슬픈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독서를 하며 피로를 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빠른 자극에 중독된 뇌는 이런 낭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술 한잔으로 하루 피로를 해결할 때가 많습니다. 술 판매량은 느는데 서점가는 울상인 것도 다 이런 이유겠지요.

 느린 행복감은 마음이 원하는 가치를 행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 관리에 관한 강연을 할 때 종종 “날라리로 사세요”라고 얘기하면 다들 좋아합니다. 아마 긴장의 이완이 일어나서겠죠. 그러나 일부 청중은 발끈해서 묻습니다, “그럼 막살란 말입니까”라고요. 물론 막살아서야 안 되겠죠. “날라리로 살아라”라는 조언은 달리 말한다면 삶의 30% 정도는 감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 성공했다는 것, 모두 모범생이란 증거입니다. 모범생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것도 소중한 가치입니다. 사람이 하고싶은 대로만 하고 살면 우리 사회는 유지되지 않겠죠.

 그러나 순도 100%의 모범생 라이프스타일은 내 감성을 질식시킵니다. 모든 모범적인 삶은 감성 노동을 동반합니다. 약간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딱 30%만 날라리로 살라고 말하는 겁니다. 혹시 내가 날라리인지, 아니면 모범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왼쪽에는 오늘 꼭 해야 할 일을 적고, 오른쪽에는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해 꼭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보는 겁니다. 인생에 죽음이라는 함수 값을 넣으면 감성이 간절히 원하는 내용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게 바로 내 감성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두 내용이 다르면 다를수록 모범생으로 살고 있는 겁니다.

 혹시 오늘 한참 동안 못 만난 오랜 친구와 술 한잔 하고 싶은 감성이라면 죄책감은 접어두고 회사 회식을 빠져보세요. 세상이 두 쪽 날 것 같지만 태양은 어김없이 뜨고 지구는 잘만 돌아갑니다. 우리 감성은 이성의 강박적 요구에 저항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때 서서히 이완되면서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물론 감성이 원하는 대로 다 하다가 인생 종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끔씩 감성이 하고싶은 일을 종이에 적는 것만으로도 감성은 뿌듯해합니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남자, 특히 일에 바빠 젊은 시절을 아내에게 소홀히 했던 나이든 남편일수록 아내와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합니다. 여성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요. 바쁜 남편을 둔 아내일수록 “조용히 혼자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합니다.

 남성분들, 이런 비극을 미리 막으려면 당장 오늘부터 30%쯤은 날라리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게 지혜로운 판단일 겁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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