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복지부는 다국적 제약사의 봉?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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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제약사는 최근 수 억 원을 들여 복제약 개발에 성공했지만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다. 같은 성분의 오리지널 약을 판매하는 다국적 제약사에서는 '환자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들에게 무료로 오리지널 약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A사 관계자는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누가 돈을 내고 약을 사 먹겠냐"며 "조만간 특허가 만료돼 약을 시판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팔아야 할지 막막하다. 한국 정부가 다국적제약사 편만 들어준다. 불공평하다"고 하소연했다.

논란의 주인공은 바로 ‘글리벡(성분명 이매티닙·노바티스)’이다. 글리벡은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에서만 연 1000억 원 이상 매출을 올렸다. 국내 전체 의약품 매출 중 2위인 초대형 블록버스터 제품이다.

▶수 백만원짜리 항암제 공짜로 먹는 백혈병 환자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를 알려면 글리벡이 어떻게 국내에 공급됐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2001년 5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최초로 시판 승인을 받으면서 등장했다.

최초의 표적항암제인 글리벡은 암 세포의 성장을 지시하는 암 단백질(타이로신 키나제)을 선택적으로 차단한다. 암 세포만 선택적으로 없애는데다가 기존 항암제와 비교해 부작용이 거의 없어 당시엔 '마법의 탄환'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이 약의 출시를 손꼽아 기다리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국내 출시는 쉽지 않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시판을 허가했지만 제약사에서 약을 공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약값이다. 당시 노바티스는 글리벡 약값을 두고 한국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여러 차례 약가 협상을 벌였지만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노바티스는 약을 공급할 수 없다며 버텼다.

약 공급이 늦어지자 암 환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파문이 커지자 결국 정부와 노바티스는 한 발짝 물러났다. 이례적으로 정부는 약값을 노바티스에서 원하는 수준으로 상향 조정해 결정했다. 대신 환자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약값의 10%를 지원하도록 합의했다. 당시에 암 환자는 약값의 20%를 자신이 부담해야 했다.

지금은 암·난치성 중증질환에 대한 약값 본인부담 비율이 5%로 줄었다. 현재 글리벡을 복용하는 환자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약값의 95%를 지원받는다. 나머지 5%는 노바티스에서 지불하고 있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는 글리벡을 사실상 무상으로 복용하게 됐다.

▶제약사들 "환자 체감 약값은 글리벡 따라잡을 수 없어"

불똥은 약값 저항으로 나타났다. 업계 일각에서 노바티스가 환자 지원 프로그램을 빌미로 불공정 행위를 하고 있고 주장했다. 이 프로그램이 약 선택권을 방해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근 출시된 2세대 표적항암제가 대표적이다. 글리벡보다 약효가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 국산 표적 항암제는 1일 약가가 6만 4000원으로 글리벡(1일 약가 8만 5124원)과 비교해 25% 수준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이들 제품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 그 동안 공짜로 약을 먹어왔던 환자들이 약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B제약사 관계자는 "글리벡은 내성으로 한계를 드러내면서 새로운 표적항암제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하지만 약효가 좋은 약이 나와도 그 동안 공짜로 약을 먹었던 터라 가격 저항이 심하다"며 "결국 정부가 특정 제약사에게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글리벡과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진 복제약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복제약은 오리지널인 글리벡 약값의 59.5% 수준에서 결정된다. 이 경우 환자 본인부담금은 약 7만9000원 정도로 추산된다. 반면 글리벡은 이보다 더 많은 13만3000원을 환자가 내야 한다. 하지만 글리벡을 복용하면 이 금액은 노바티스에서 지급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글리벡은 공짜, 나머지 약은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복용할 수 있는 약이 된다.

C제약사 관계자도 "아무리 약값을 떨어뜨려도 환자입장에서는 공짜인 글리벡을 따라잡을 수 없다. 게다가 노바티스는 약값도 높아 수익도 크다"며 "아직 제품을 출시하지 않았지만 복제약이 나오면 분명 형평성 논란이 일 것"이라며 "법률 자문을 받은 결과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자문을 받았다. 공정위에 제소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유경숙 사무국장은 "글리벡은 다국적제약사가 환자 본인부담금을 지원하면서 환자의 상태에 맞는 적합한 약이 아닌 가격을 기준으로 약을 선택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유 사무국장은 이어 "기존 환자는 물론 새로운 환자도 당연히 글리벡을 선택할 것"이라며 "정부에서 문제를 유발했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노바티스 관계자는 "(글리벡 환자 본인부담금 지원 폐지에 대해) 내부적으로 논의 중"이라며 "정해진 사항은 없다"고 말했다.

▶ 복지부 "논란은 알지만…." 해결은 어렵다?

정부 역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글리벡은 해마다 약품비 청구 3위권 안에 들 만큼 건강보험 재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비싼 약이 많이 사용하면 그 만큼 건강보험 재정에도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노바티스가 매출을 올리면서 약값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 환자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 류양지 과장은 "논란에 대해 알고 있지만 정부가 제약사에 일방적으로 지원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법원에서도 복지부가 이를 조정할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고 덧붙였다.

▲ 2009년 당시 시민단체들이 복지부에 글리벡 약값 조정안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면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앞서 복지부는 글리벡 약값을 한 차례 직권 인하했었다. 글리벡이 스프라이셀과 비교해 경제성이 낮은데다 고함량 글리벡을 고의적으로 판매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환자본인부담금 지원 비율이 축소돼 부당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바티스는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복지부는 2차례에 걸쳐 소송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패배로 끝났다. 당시 1심 재판부는 "글리벡 약값이 산정이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어 복지부의 직권인하는 위법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런 환자 지원프로그램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환자 지원프로그램 도입 당시 복지부는 "글리벡 적응증이 확대 돼 대체 약물이 있는 질병까지 무상공급을 지원할 경우 공정거래법 등 관련 법령에 저촉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도 "글리벡 특허가 만료된 다음에는 본인부담금 지원이 어려울 것"이라며 "몇 해 전 글리벡 경쟁 제품이 등장할 당시에도 공정거래법 위반 관련 유권해석이 있었다. 글리벡 특허가 만료될 때까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6월 이후엔 차츰 정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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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미 기자 byjun3005@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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