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資유치 계획이 '국내工團'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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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부가 2년에 걸친 산고 끝에 만들어낸 동북아 중심국가 구상이 새 정부 인수위원회에 의해 한달 만에 졸지에 바뀌게 생겼다.

쟁점은 오는 7월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는 영종도.송도신도시.김포매립지 등 수도권 서부지역을 어떻게 개발하느냐는 문제다.

정부 원안은 외국기업을 유치해 금융.서비스.물류의 중심지로 육성한다는 것.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를 경쟁 상대로 꼽아 왔다.

정부는 지난해 수차례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거쳐 우리가 살 길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것도 제조업보다 금융.서비스 등 부가가치가 높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은 바 있다.

이에 맞춰 이미 지난해 말 외국기업에 세금 감면을 해주고, 노동규제 완화, 외국병원.학교 개방 등을 담은 관련 법을 제정했다. 인천시는 송도신도시에 국제비즈니스센터를 세우기로 하고, 부동산개발 업체인 미국 게일사와 1백27억달러의 외자유치 계약을 해놓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인수위가 경제자유구역을 정보기술(IT)을 중심으로 한 생산.연구기지로 육성하겠다고 28일 밝힌 것이다.

이는 '사무실'보다 '공장'개념에 가깝다. 게다가 인수위는 외국기업보다 국내기업을 먼저 모아놓으면 자연히 외국기업이 뒤따라 들어온다는 '선(先) 국내기업, 후(後) 외국기업' 구상을 내놓았다.

재정경제부는 "국내기업 공단을 만들어 어떻게 동북아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인수위의 생각=인수위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곳은 송도 신도시다. 여기를 미국의 실리콘 밸리처럼 IT산업의 메카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태인 인수위원은 "송도를 연구개발의 허브로 만들겠다"며 "정부 원안에도 송도에 IT단지가 들어서도록 돼 있기는 하지만 규모가 너무 작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기업을 유치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에 대해 인수위는 한국에 올 외국기업이 별로 없다는 현실론을 내세우고 있다.

인수위는 외국기업이나 외교관들과 만나 논의한 결과 세금 감면 등의 혜택으로는 홍콩.싱가포르에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으로 오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홍콩.싱가포르 같은 소규모 도시국가의 성장모델을 한국에 적용하기는 무리라는 얘기다.

인수위의 다른 관계자는 "한국이 중국으로 휴대전화를 대규모 수출하면서 휴대전화의 중심국가가 됐듯 IT 관련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서 IT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기지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경제자유구역을 개성공단과 연계하는 방안과 남북횡단 철도를 시베리아.중국 횡단철도와 연결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

금융에 대해 김대환 경제2분과 간사는 "금융은 민영화와 경쟁력 확보 등 선결 과제가 남아 있다"며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 내에서는 산업자원부가 동조하고 있다. 신국환 산자부 장관은 "우리 금융산업은 조속한 시일 안에 주변 경쟁국을 따라가기 어렵다"며 "산업의 중심은 역시 제조업이며 동북아 중심국가 구상은 생산기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혹스러운 재경부=정부 원안의 핵심은 송도 신도시의 국제비즈니스센터와 김포매립지의 국제 금융단지다. 종래의 제조업 중심의 발상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게 재경부의 생각이다. 제조업은 이미 국내 곳곳에 조성돼 있는 다른 수많은 공단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국내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외국기업을 끌어들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국내기업을 모아 뭐가 나아질 게 있느냐는 것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경제자유구역을 금융.서비스 중심지로 만들고,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물류단지를 육성해 외국인을 끌어들여야 한다"며 "다국적 기업의 아태본부와 유수의 외국 금융기관을 끌어들이면 부가가치가 엄청나고, 내국인의 일자리도 크게 늘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경제자유구역을 생산기지 중심으로 만들면 외국인이 들어와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제자유구역을 생산기지로 해서는 채산성이 안맞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인천시 관계자는 "송도신도시와 김포매립지 매립비용이 평당 1백만원을 넘는데 생산기지로는 도저히 그만한 개발이익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재계는 인수위의 구상을 환영하며 경제자유구역에 진출하는 국내기업에 외국기업과의 역차별을 없애고, 대대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경제자유구역에 들어가는 국내기업에 어느정도 혜택이 주어질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고현곤.이상렬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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