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 미 「리·로크우드」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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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하노이」에선 사진기를 휴대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꼭 통역관이 따라다녔고 시골에선 보통 두세 명의 지방관리들이 따랐다. 첫 10일 동안 내가 찍은 「필름」은 당국에서 현상을 하고 검열했으나 결국 「칼라」사진 촬영을 허락 받은 후부터는 검열이 해제됐다. 65년 2월부터 시작된 「마이·바이·미」(미기)내습은 월맹인의 모든 생활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침 6시부터 7시가 「러시·아워」이고 주요 일용품 백화점은 새벽 5시 반에서 7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만 문을 연다. 큰 시장바닥은 텅 비어 있고 그 대신 매일 자리를 옮기는 조그마한 이동 시장이 선다. 50만의 「하노이」 시민(65년 기준)을 어떻게 분산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당국의 큰 두통거리다.
이미 수십만의 어린애들을 시골로 분산시켰고 혹시나 폭격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입을까봐 언제 어디서나 12명 이상의 집회는 금지되어 있다. 나는 「뉴요크·타임즈」의 「솔즈버그」·「마이애미·뉴스」의 「바그즈」 등 다른 기자들의 기사를 보았으나 내가 본 폭격피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노이」 남방 어느 곳에선 2백명이 도로상의 40「피트」나 파진 웅덩이를 메우고 있었는데 아침 8시에 폭격 당한 이 웅덩이는 오후 2시에 완전히 보수되었다. 시내 모든 인도에는 6「피트」 간격으로 1인용의 「콘크리트」 반공호가 파여 있고 학교 교실 밑에도 방공호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이공」까지 뻗은 1번 국도는 메워진 웅덩이와 임시로 가설된 다리의 연속으로 상처투성이였다. 「하노이」에서 약 24「킬로」 떨어진 교외 도로 연변의 민가는 거의 파괴되어 있었고 도로연변에는 보수용 자갈과 돌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대부분의 이동은 야간에 이루어진다. 어느 날 밤 「지프」차 모양의 소제차를 타고 「남·딘」에서 남쪽에 있는 「탄·호아」에 갈 기회가 있었다. 도중 짐을 가뜩 실은 47대의 「트럭」행렬이 좁은 부교를 건너려고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선두차의 운전수는 무려 2시간을 기다렸다고 하며 건너편에는 북으로 올라오는 52대의 텅빈 「트럭」 행렬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손님 대접을 받아 제일 먼저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푸·리」시는 폭격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질 정도다. 7천7백명의 주민들은 오래 전에 피난을 갔고 이곳 관리 말에 의하면 40회 이상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과거 월맹 제3 도시였던 고향 「남·딘」은 7함대에서 출격한 폭격기에 의해 반쯤 달아났다. 「남·딘」에서 남으로 내려가던 날 밤 쌍발 「제트」기 한 대가 우리 차 바로 50「피트」앞에서 나무높이 정도로 스치면서 기관포와 6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겁에 질려 차에서 뛰어내려 길가 대피소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내통역관이 그곳에 숨어있었다. 몇 채의 흙집이 있었으나 피해는 입지 않았다.
1월 29일에 폭격이 있었다는 「탄·호아」시엔 서 있는 집은 모두 텅 비어 문이 잠겨 있었다.
「탄·호아」시장은 발끝으로 자갈을 차면서 나에게 말했다. 『우리 시는 끝장이 난 것 같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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