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총통의 일기로 밝혀진 서안사건의 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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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금부터 31년 전. 1936년 12월 12일 아침 5시 중국 서안에서 발생한 장개석 총통의 납치사건에서 주은래가 「아이러니컬」한 일역을 맡았다 함은 이미 알려진 사실-. 당시 이 사건의 주역을 맡았던 청년원수 장학량이 그의 「회고록」속에서 드러내지 않은 사실이 최근 장 총통 자신의 일기를 통해 밝혀지고 있어 이 극적인 사건의 진상을 더욱 뚜렷이 해주고 있다.
장 총통은 이날 새벽 2명의 병사에게 피체된 후 당시 중국 서북부 주둔군 사령관 「양푸쳉」장군의 집으로 끌려간 다음 바로 이곳에서 장학량과 양장군을 만났다고 그의 일기속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때 이들 두 사람이 장 총통에게 반공투쟁을 중단하고 공산주의자와 협력하여 대일 선전포고 하도록 강요했었다.』고-.
장 총통은 그후 중국본토를 피해 대만으로 퇴주 할 때 장학량을 붙잡아 감으로써 그에 대한 앙갚음을 톡톡히 치른 것이며 그 뒤 계속 장학량을 대만의 가택에 연금 해오다가 지난 1960년에 그를 사면해 주었다.
장학량은 서안사건 발생때 20대의 저돌적인 청년.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동북부 주둔군의 지휘를 인계 받았고 그의 아버지의 죽음은 또한 그에겐 보다 극렬한 일본인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장학량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대일 투쟁이었다. 대일 전투가 더욱더 그의 강박관념을 높였고 결국 공산주의자들과 어떠한 화해를 시도해봤다고 한다.
그당시 연안지방은 공산군들이 대장정 후에 지쳐서 동면의 장소로 쓰던 곳.
『어느 날 밤 나는(장학량) 연안의 한 「가톨릭」교회에서 주은래와 두세 시간 동안 면담했다. 그때 나는 주에게 장 총통이 국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주도 내 뜻을 이해하면서 장 총통을 설복 시켜 우리들에 가담토록 하고 그를 석방시킴이 어떠냐고 나의 양보를 바랐었다. 그러나 주은래는 장 총통의 주위인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고 물었었다고 장학량은 회고록 속에서 기술하고 있다. 주와 장은 그때 『전쟁이 끝나면 공산주의자들이 영국이나 미국 기타 국가에서처럼 하나의 합법정당으로서 인정돼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장학량과 양 장군이 장 총통의 처리문제로 서로 극단적인 의견대립을 노출하였다 한다. 즉 양장군은 장총통을 살해할 것을 우겨댔다. 그러자 이때 주가 장학량에게 잠시 휴식을 갖도록 권고하고 마침내 양장군으로 하여금 장 총통을 방면해 주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날이 바로 「크리스머스」. 이날 장개석 총통은 이곳에서 풀려 나와 먼저 「로양」을 거쳐 남경으로 빠져 나온 것이다. 한편 남경에선 그의 귀환을 축복하기 위한 대 시민 축제가 열렸다고 당시의 장면을 목격한 어느 노 기자는 술회하고 있다. <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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