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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독립과 언론의 자유 - 홍종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신문의 독립과 경영의 안정>
오는 4월 7일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1896) 서재필 박사의 손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 현대판의 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간한 날이요, 그리고 이 날로부터 61년의 돌을 맞이하는 듯에서 우리 일간신문 통신사의 주필, 편집국장들이 한국신문편집인 협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신문주간을 설정한지 10년을 맞이하는 날인 것이다. 돌아보건대 독립신문은 그 발간이 단순한 신문의 역사로서뿐 아니고 부패하고 무능하고 몽매한 당시의 정계 권력층의 망국적 처사에 대항하여, 국민을 깨우쳐 국민의 정치적 자유에 의하여 개혁과 진보를 도모해 온 근대적 민주사상의 창도자로서 또 대중의 정치적 동원의 선봉자로서 한국정치사상 커다란 횃불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뜻이 더 큰 것이다.
서재필 박사는 우리 현대사의 혜성과 같은 분이었다. 불과 21세에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글자 그대로 「3일 천하」로 정부 전복의 거사가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지 십이년만에 33세로 다시 고국에 돌아올 때 그는 민중을 깨우치고 청년의 힘을 일으켜 나라의 혁신적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길을 닦아나가고자 그 가장 큰 수단으로서 신문을 발간키로 했던 것이다. 독립신문의 「독립」은 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한 국민독립정신의 배양과 아울러 정치·사회에 대한 정의의 비판, 폭로를 위한 진실과 정의를 신조로 하는 언론의 자유·독립을 뜻했던 것이다. 쓰러져 가는 국가의 형세를 돌아보며 국가의 독립이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웠을 것이며, 국사를 망쳐가고 있는 부패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대중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가두의 연설이나 신문의 활동을 위하여 자유가 어찌 제한되고 억제될 수 있었으랴!

<국가의 목적과 사회의 이익>
그러면 오늘 우리는 국가의 독립을 되찾고 헌법의 정중한 표현 속에 누리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과연 어느 정도이며 또 어떻게 하며 더 크게 그 자유를 빛낼 수 있고 따라서 신문의 독립을 예찬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우리 나라의 신문은 기업적으로 많은 발전을 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신문과 신문기자의 자유와 독립은 아직 갈수록 태산이라고 할 것이다. 어느 편으로는 독립신문 발간 당시나 그 후 신문계 선각자들이 겪어 온 고초와 그 기백에 비겨볼 때 부끄러운 점이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신문의 독립은 경영의 안전을 절대 필요로 한다고 한다.
그러나 수지타산을 위한 적당한 흥정이 곧 신문의 독립을 뜻하는 것은 못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어떤 힘에든지 제약받지 않으리라는 언론자유의 본래의 정신에 투철하는 데서 비로소 신문독립의 생명을 빛낼 수 있는 것이고 그리함으로써 국민대중의 지지를 더 많이 받아 경영의 확고한 지반도 잘 쌓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또 언론의 자유란 것은 국가의 목적과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대중의 깊은 이해를 구하며 스스로 자기자신을 독려 편달하는 데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국민대중의 이해와 신뢰를 거둔다는 일은 신문의 본래의 사명을 위해서나 신문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나 가장 값어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신문편집인협회가 이번 신문의 날의 표어를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자」고 내건 것도 이런 점에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네 신문들은 과연 어느 정도로 국민의 알 권리를 만족시키고 있는가? 70년 전 독립신문이 발간되던 그 때는 지금보다 몇 곱절 한문에 중독된 시대였을 것이나 그러나 독립신문은 완전한 우리말에 의한 우리 글로 기록된 신문으로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당시의 식자층의 더 많은 이해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국민대중을 깨우치는 개혁과 진보의 뜻깊은 본보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화를 외치는 오늘의 신문엔 왜 한글신문이 통용 못되는가. 국민대중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보람있는 신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오늘의 신문들은 우선 한문자의 중독, 외래어, 외국문자의 남용에 대해서만이라도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제한 필요한 지식의 보급>
자유의 길에는 원래가 끝이 있을 수 없는 만큼 언론자유의 길에는 지식의 무제한한 보급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법과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하더라도 지식과 경험이 모자라고서는 언론자유는 본래의 가치를 발휘키 어려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의 자유의 수확은 신문기자의 유능한 활동에서 얻을 수 있고 신문기자의 유능한 활동은 진실을 사랑하고 정의의 정신에 투철코자하는 정신에서 끊임없는 정신의 양식보급을 받도록 꾸준히 다각적으로 공부를 쌓아 올리는 데서 비로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신문은 우선 그 표현의 능력을 위하여 문학 예술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국가나 사회제도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정책의 문제를 위해서는 정치·경제·법률 등의 지식을 필요로 할 것이고, 새로운 발명과 기술의 개선 보급을 위해서는 과학의 지식을 필요로 할 것 등 각 분야에 따라 새로운 전문적 지식이 얼마든지 필요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 나라, 한 민족의 역사적 방향을 바로 보고 그 방향에서 신문이 보다 유능하게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할 때 신문기자의 관점과 비평의 안목은 역사와 철학을 떠나서 이야기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신문기자라고 만능의 지식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분야에 따라서 전문적인 지식과 지식의 종합적인 활달한 활용을 위한 공부는 어느 직업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다. 보는 눈을 크게 하기 위해서, 또 소식을 세계에서 널리 구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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