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火傷> 소녀' 60년 만에 재회

미주중앙

입력

김연순(72ㆍ여)씨가 고운 옷매무새를 연신 다듬었다. 그때 '나의 살던 고향은…'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백발의 리처드 캐드월러더(82)가 들어섰다. 김씨는 뛰어가 그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안고, 또 바라봤다. "고마워요. 고마워…." 김씨는 울먹였다. 한국어를 못하는 캐드월러더도 김씨를 안으며 "베리 베리 베리 해피"(정말 행복하다)를 연발했다.

국가보훈처는 1일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화상(火傷)소녀' 김연순씨와 6ㆍ25전쟁 참전용사 리처드 캐드월러더의 상봉을 주선했다.<본지 1월 30일자 a-3면>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건 1953년. 수원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소속 캐드월러더는 화성 매향리 초소에 근무했다. 그는 "그해 겨울밤 한 모녀가 다급하게 막사 문을 두드렸다"며 "문을 열자 검은 타르 같은 걸 뒤집어쓴 소녀가 보였는데 심각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고 첫 만남을 회상했다.

캐드월러더는 하우스보이 에이스(백완기씨)에게 '모녀가 휘발유통이 터져 화상을 입은 채 8㎞나 되는 길을 걸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급히 무전을 쳐 의무병에게 응급치료를 하게 하고, 사령관에게도 연락해 소녀의 치료를 부탁했다. 그 덕에 소녀는 헬리콥터로 청량리 군병원으로 후송돼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캐드월러더는 다음 해 4월 완쾌된 소녀를 찾아본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013년. 그는 지난 1월 화상소녀를 찾고 싶다는 편지를 한국에 보냈다. "평생 소녀의 용기를 기억하며 멀리 둔 딸처럼 생각하고 살아왔다"는 사연도 담았다. 보훈처는 김씨를 수소문했다. 김씨는 60년 전 바로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이날 김씨는 캐드월러더에게 한복을 선물하며 "치료를 받으며 리처드를 미국 아버지라 불렀다. 한동안 꿈에도 나왔지만 찾을 생각은 못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화상 흉터 때문에 사진찍기를 꺼려한다는 김씨는 이날만큼은 환하게 웃으며 '미국 아버지'와 60년 만에 행복한 사진을 찍었다.

정원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