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들의 특별한 합숙 … “타인과 사는 법 깨달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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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대 신입생들은 3주간의 기숙사 생활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운다. 15~16명이 엉킨 빨래처럼 옆 사람과 양손을 엇갈리게 맞잡은 뒤 이를 풀어내는 ‘빨래통 놀이’도 그중 하나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엇갈린 양팔을 풀 수 없고 함께 몸을 부대끼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난달 28일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빨래통 놀이를 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올해 서울여대에 입학한 연지현(19)씨와 이지은(19)씨는 지난달 24일부터 학교 기숙사 방을 함께 쓰고 있다. 오는 13일이면 지현씨는 서울의 자기 집으로, 고향이 포항인 지은씨는 입학 전 구했던 학교 인근 자취방으로 돌아간다. 두 사람과 함께 기숙사 608호에 딸린 방 4개를 나눠 쓰는 다른 13명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진짜 어색했죠. 다들 전공도 제각각이고 고향도 다르잖아요. 괜히 휴대전화를 쳐다보고 평소엔 안 하던 공부를 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기숙사 입소 첫날, 15명의 학생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같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도 꺼렸다. 청소와 정리는 스스로 해야 했다. 초·중·고 내내 대부분 혼자 방을 쓰고 청소와 빨래는 엄마에게 맡겼던 학생들에겐 생소한 일이었다. 들어온 지 셋째 날이 되자 화장실 휴지통이 꽉 찼다. 아무도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608호 학생들은 회의를 열어 생활 규칙을 정했다. 첫째는 거실과 화장실 청소는 함께 하기, 둘째는 샤워한 뒤 빠진 머리카락은 직접 치우기, 셋째는 분리수거 잘하기였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지현씨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기숙사에 들어온 건 서울여대 신입생들이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바롬인성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학생들은 1학년 1학기 때 3주 동안 바롬인성교육관에서 합숙 생활을 한다. 올해도 1800여 명이 네 번에 걸쳐 교육을 받고 있다. 1961년 개교했을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바른 성품을 갖지 않으면 기술과 지식이 제대로 쓰일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개교 당시에는 학생 전원이 4년 동안 기숙사와 실습주택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신입생이 늘면서 합숙기간이 조금씩 줄어 1998년부터 지금과 같은 3주가 됐다.

 그냥 합숙만 하는 게 아니다. 정규수업이 끝난 오후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인성에 대한 수업을 듣는다. 강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인생 그래프 그리기 등을 통해 꿈을 찾고, 예절 등 인성을 배우며, 선배들로부터 대학 생활에 대해 조언을 듣는다. 오전 7시부터는 인성을 주제로 한 원어민 영어수업도 진행된다. 예를 들어 용기(courage)나 자선(charity)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발표하는 식이다.

 기자가 기숙사를 찾은 지난달 28일 저녁엔 예절 수업이 한창이었다. “여러분, 인사(人事)라는 한자의 뜻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에요. 인사는 그저 상대방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먼저고 그것이 몸 밖으로 표현돼야 하는 거죠.”

 강사의 설명에 따라 학생들은 악수나 인사 등을 직접 실습했다. 수업이 끝난 뒤엔 기숙사에 모여 방별로 생활교육이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원과 시험 부담에서 갓 해방된 대학생들에게 합숙 인성교육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경영학과 1학년 권소망(19)씨는 “솔직히 처음 들어갈 때는 불만도 있었어요. 그런데 3주 동안 지내면서 ‘고등학교 내내 내 공부, 내성적….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살았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라고 말했다. 권씨는 요즘 무슨 일이든 남을 먼저 배려하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해 신입생 2000명을 상대로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인간 관계에 도움이 됐다’는 응답이 5점 만점에 4.5점 나왔다. ‘친구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4.3점)는 답도 많았다. 올해 1차로 교육을 받은 52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학생들의 도덕성과 배려심 등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여대의 인성교육은 3학년까지 이어진다. 2학년 때는 2주간 합숙을 하며 주로 소통·공감하는 법을 배운다. 3학년이 되면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인권 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다. 1~3학년 모두 1학점짜리 필수교양과목이라 수업을 듣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다.

 권계화(수학과 교수) 서울여대 바롬인성교육원장은 “핵가족화와 입시 경쟁으로 중·고등학교 때 인성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 진출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타인과의 소통 능력 등 인성을 길러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이한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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