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과 보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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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30면

우리 사회의 여러 부문이 그렇지만 법원 역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일부 법관의 법정 언행이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충분한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분석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그러나 법관의 업무량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핑계 같기도 하지만 과중한 직무를 수행하다 보면 사실 기부나 자선활동에 마음을 돌릴 여유가 많지 않다. 그래서 항상 뭔가 빚진 느낌에 시달리기도 한다. 물론 종교단체나 자선단체에 출연을 하기도 하지만 충분한 나눔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천국이 있다고 가정할 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직업적 과업만 충실히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아니면 별도의 선행이나 자선을 행해야 하는가? 물론 선행이나 자선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도 있고, 평상심이 곧 도(道)이고 지금 이곳이 곧 극락이라는 법문도 있지만 그런 형이상학적인 논의는 접어두자. 그런 면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매우 유리한 직업이다. 병들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 그래서 인술(仁術)이라 불리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비록 생계의 수단이라 할지라도 그 속성상 선(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처리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는 법관은 어떤가? 재판은 의료행위와 달라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경우에도 관련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경우가 드물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큰스님께 질문을 던졌다. “판사의 일이 그것을 충실히 행하기만 하면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그런 것인가요?”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물론이지요”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이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꼭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가 보시입니다. 보시는 다시 세 가지로 나뉩니다. 자신이 가진 재물 등을 나누는 재시(財施), 진리를 나누는 법시(法施)가 그중 두 가지입니다. 나머지 하나가 무엇인 줄 짐작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잘 알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 못한 말씀이 이어졌다. “사람들을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법관의 직무는 자비행 중 가장 중요한 무외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정당한 자기의 몫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공포를 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보시이고, 재판은 바로 그것을 하는 일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나 재산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일, 죄를 저질렀더라도 사적 보복이나 과도한 편견 없이 그에 상응하는 벌만 받도록 하는 일, 분쟁이 발생한 경우 분쟁 그 자체의 내용에 따라서만 승패를 가르는 일, 그래서 자기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상대와의 분쟁도 정의롭게 해결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일, 이 모든 것이 법관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물론 법학을 처음 시작할 때 모두 배운 것들이다. 결국 자유, 평등,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 곧 사람들을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공포에 노출되어 있다. 심리적 측면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빈곤이나 실직의 공포와 같이 경제적·사회구조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전쟁의 공포와 같이 정치·외교적 문제로 인한 것도 있다. 법관뿐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모든 공직자는 국민들이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할 책무가 있다. 그 일을 잘 처리하는 것만큼 큰 보시는 없으리라.

 그러고 보면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따로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베풀 수 있는 것이 많다. 무재칠시(無財七施)라 하여 가진 것 없이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가 있다고 한다. 사람을 대할 때 미소 띤 얼굴로 하는 화안시, 공손한 말로 하는 언시, 따뜻한 마음으로 하는 심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하는 안시, 일손을 거들어 주는 신시,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 편안히 쉴 여지를 주는 방사시(房舍施)가 그것이다. 오늘도 이런 공덕을 쌓는 하루가 되길 기원해 본다.



이승련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3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지방법원 판사,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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