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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 서제숙 기자 제2신 |화전이 공존하는 민가와 병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접시 핥는 뒷골목>
전쟁으로 인한 우울한 공기로 꽉 차있으면서도 「사이공」은 화려하고 풍부하고 잔잔한 곳이다. 많은 「호텔」과 술집·요릿집엔 손님이 넘쳐흐르고 각종 외래 상품이 눈부시게 진열되어 있다. 큰길에는 잠자리 날개 같은 「아오자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예쁘게 「페티큐어」를 한 발에 「샌들」을 걸친 아름다운 여성들이 오가고, 뒷골목 노천 음식점 앞에서는 노동자 같은 여윈 남자들과 맨발의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음식 접시를 열심히 훑어 먹고 있었다.
「사이공」의 명동 「투토」가를 지나 「메자스틱」까지 가는 사이에 맨발의 신문팔이 소년과 「첸마니」 「첸마니」(그렇게 들렸음=체인지·머니)라고 부르며 뒤를 따라오는 빈약한 체질의 「달러」를 사는 소년들의 반짝이는 눈빛들….

<공항의 환영 인파>
15일 정오 정 총리가 도착한 「탄손누트」 공항은 조용한 인파가 폭양 아래 물결치고 있었다. 태극기를 든 남녀시민들은 온통 「트럭」으로 실려 공항에 모여들었고 「트럭」에 실려 흩어지고 말았다.
공항이외의 거리에는 총리의 도착을 구경하는 사람하나 없었다. 어떤 의미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어떤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든지 「사이공」 시민은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 환영 「프래카드」와 양쪽 길가 전신주에 꽂힌 한·월 양국 국기가 지친 듯이 늘어져 있을 뿐이다. 여위고 눈만이 반짝이는 것일까….

<폭음은 쉬지 않고>
16, 17일 이틀 동안은 「나트랑」(백마)과 「퀴논」(맹호) 「출라이」(청룡) 등 파월 한국군 주둔지를 방문했다. 저공을 나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이는 남지나 연안 동쪽 월남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횐 벽에 붉은 지붕을 한 건물들이 푸른 숲 사이사이에 둘러싸인 작은 항구의 도시들과 푸른 논밭이 이어지는 중간마다 야자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초가의 농가들,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가는 풍경은 정답고 낮 익은 풍경이다. 건너편 산허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포성과 포연이 하늘을 찔러도 농부는 그대로 밭을 갈고 있었다.
잠시도 「헬리콥터」와 비행기의 폭음이 그칠 사이 없는 넓고 정돈된 한국군 기지와 바로 그 옆 졸듯 잠잠한 민가는 마치 전쟁과 평화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듯했다.

<할말 잊은 아낙네>
전투보다도 찾아 든 손님(총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도때기 시장처럼 붐비고 서두르기만 하는 한국군 장성들에 비해 손님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그곳 월남 면장 딸과 아가씨들은 사뭇 무표정으로 침착할 뿐이었다.
너무나 오랜 전쟁 때문에 그들은 어떤 위기나 전쟁에 대해서는 마비상태일까. 어디를 가나 여위고 지친 얼굴에 눈만이 깊고 반짝이는 사람들뿐이다.
남편의 허리를 꼭 껴안고 질주하는 「스쿠터」 뒤에 매달린 도시의 여인들이나 조용히 자전거를 몰고 가는 농촌의 아낙네들…. 모두 할말을 잊은 때문이다, 말을 해야 더위에 더욱 지칠 뿐 소용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말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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