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문화시설 짓는다더니 장례식장이 웬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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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연탄가루와 열차 소음에 시달려 왔는데 갑자기 장례식장까지 들어선다니 기가 막힙니다. "

장례식장 건립을 둘러싼 마찰이 곳곳에서 일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수원과 광주에서 병원이나 문화시설로 건축허가를 받은 건물들이 장례식장으로 둔갑해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업주들은 의료시설 등을 장례식장으로 용도 변경할 경우 당국에 신고만 하면 된다는 규정을 내세워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방자치단체는 법적으로 마땅한 제재 수단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장례식장 용도 변경=南모(43)씨 등은 지난해 4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수원역 인근 옛 삼천리 연탄공장 부지에 지상 3층(연면적 1천9백㎡)짜리 병원을 짓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南씨 등은 "내과 진료실 등이 있는 노인병원을 짓겠다"며 건축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건물이 완공되자 분향소 여덟개를 갖춘 장례식장으로 용도변경, 구청으로부터 사용승인을 받았다. 현재 장례식장 주변 50~3백m에는 단독주택들이 밀집해 있으며 1백m 떨어진 곳에는 건설업체가 대규모 아파트를 짓기 위해 부지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또 경기도 광주시 역동 90 일대에 金모(53)씨가 지상 2층(연면적 8백㎡) 규모로 지은 건물도 준공 1주일 만에 장례식장으로 용도 변경을 추진 중이다. 金씨는 당초 이 건물을 '문화 및 집회시설'로 허가를 받아 신축했다.

◇주민 반발=장례식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서둔.평.매산동 주민 3천여명은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주민대책위원회(대표 김장덕) 소속 2백여명은 지난 13일 수원시청을 방문, 장례식장 개업을 막아주도록 요청했다.

주민들은 "정부가 장례식장 건립을 권장하면서 장례식장 용도가 묘지 관련 시설에서 의료시설로 변경된 현행법의 맹점을 악용했다"며 "당초 목적과 다른 시설을 만드는 것은 주민을 속이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주민들은 "열차 소음과 연탄 분진으로 30여년을 고생했는데 기피시설까지 들어서면 어쩌란 말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민들은 지난 6일부터 지금까지 10여차례 업주 측과 협상을 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주민들은 앞으로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실력행사와 함께 법정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광주시 역동 주민들의 반발도 거세다. 주민 金모(51)씨는 "낙후된 마을에 문화시설이 들어선다고 해서 지역발전이 앞당겨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며 난감해 했다.

◇수원.광주시 입장=수원시는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한 업주가 병원 건립을 가장해 장례식장을 세운 의혹이 있다고 보고 우선 주민들과 업주 간의 합의를 유도할 계획이다. 시는 그러나 양측의 마찰이 계속될 경우 장례식장 내 식당 영업을 금지하는 등 부대시설 규제를 통해 장례식장 영업을 제한할 방침이다.

광주시는 이미 현행법상 '영업허가를 받으려면 업주가 지역에서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을 내세워 일단 영업신청서를 반려했다. 그러나 업주 측이 적절한 보완조치를 한 뒤 영업신고를 해 올 경우 뚜렷하게 제지할 근거가 없는 실정이다.

◇업주 입장=장례식장 운영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데도 자치단체가 영업을 막을 경우 행정심판 절차를 밟기로 했다. 또 주민들이 영업에 지장을 줄 경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이들은 이미 30억~50여억원을 투자했으므로 업종 변경은 엄두도 못 낸다는 입장이다.

수원 장례식장 관계자는 "처음에는 노인병원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의사 채용의 어려운 데다 운영상 문제가 적지 않아 부득이 장례식장으로 변경했다"며 "주민들을 설득하는 한편 주민들을 장례식장 직원으로 우선 채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정찬민 기자 <chan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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