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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은 김 선배에게 쓰는 편지

중앙일보

입력

선배님, 참 오랜만이네요. 작년 선배님네 아이 첫돌 때 뵙고는 연락 한번 못 드렸어요. 그렇게 무심하던 녀석이 갑자기 왠 편지냐구요? 제가 엊그제 어떤 그림책을 보았는데 갑자기 선배님 생각이 났어요. 지금쯤 선배님네 아이는 아장아장 걸어다닐 테고 “아빠, 아빠.” 부르며 선배님을 감격시킬 테니까요. 우리집 딸은 작년에 다 뗀 일이지만... 선배님, 그러게 왜 그렇게 결혼을 늦게 하셨어요.

그런데 선배님, 살다 보니 아빠 노릇 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군요. '아빠, 아빠' 하고 매달리는 어린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세상 일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던가요. 어린 것과 놀아줄 시간을 내기도 어려워요.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와서 세수를 하고 나서야 겨우 몸을 추스립니다. 그리고 콜콜 잠든 딸의 곁에 앉아서 녀석의 얼굴을 잠깐 바라볼 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아빠하고 나하고』(유문조 외 지음, 돌베개어린이)를 보고는 여러 기분이 교차했어요.

이 책은 유아를 위한 그림책이에요. 선배님네 집에도 이런 책들이 몇 권 있을 겁니다. 그런데 유아를 위한 책들 중에는 조잡한 것들이 무척 많아요.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책이라면 더욱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냥 조악한 그림으로 대충 만든 책들도 많습니다. 글자 몇 자 안 되는 유아 그림책이라고 너무들 우습게 보는 거죠. 유아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줄도 모르고.

『아빠하고 나하고』를 보고 있으면 동물들의 장기 자랑을 생중계로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마치 '가장 멋진 동물 부자(父子) 뽑기 대회'를 구경하는 것 같다니까요. 혹시 부녀일지도 모르지만 글쎄, 악어 부자는 입을 쩍 벌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와서는 "아빠하고 나하고 대장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하고 대뜸 소리를 지릅니다. 나 참, 누가 자기들을 대장 시켰습니까? 아빠만 있으면 무서운 게 없나 보죠?

사자 부자는 또 뭐라는 줄 아세요? 고개를 잔뜩 치켜들고 눈에 무섭게 힘을 주고는 "아빠하고 나하고 으르렁, 무섭지?” 이러는 거예요. 고릴라 삼부자는 더 난리예요. 으쓱거리는 아빠 팔에 매달린 두 아기 고릴라가 이렇게 자랑합니다. "아빠하고 나하고 우리 아빠 힘세다!" 어허, 이쯤 되면 "그래, 너희 아빠들 잘났다!" 이런 말이 불쑥 솟구쳐요.

사랑하는 우리 아이를 위하여

그런데, 선배님.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동물들의 우스운 행동이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는지 아세요? 어떤 동물도 "나는 우리 아빠를 사랑해요!" 같은 낯 간지러운 직설법을 구사하지 않는데도 그 속마음이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거예요. 아빠하고 아기하고 함께 어울려 놀며 장난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겁니다.

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빠하고 나하고' 하는 구절이 리듬을 타고 이어지며 반복의 묘미를 깨닫게 해요. 유아들은 반복적인 리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을 통해 조금씩 정서를 키우고, 언어를 습득합니다. 이 그림책은 그런 '유아 정서의 비밀'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유아들이 이 책을 보며 까르르 깔깔, 좋아할 만하지요.

하지만 선배님, 이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이 그림책 속의 악어처럼 아이들의 영원한 대장이 될 수 있을까요? 위풍당당한 고릴라처럼 언제나 힘센 아빠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들고 돌아다니며, 보고 또 보며 좋아하는 아이 곁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힘들지만 아빠에게는 꼭 걸어가야 할 길이 있겠지요. 그 길에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 아기를 돌봐야 할 테지요. 휴우,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선배님. 우리 힘 내요. 우리 아빠들, 모두 힘냅시다! 세상은 늘 그랬듯이 자고 나면 언제나 시련의 첩첩산중이지만, 까짓거 우리도 아이들하고 함께 외치는 거예요. 아이를 무동 태우고 동네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소리치는 거예요.
"아빠하고 나하고 대장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하하하!"

(최덕수/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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