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이조 중엽-말엽 인물중심) - 유홍열|문호개방의 선각자 남종삼(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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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불란서 신부 통해 연락할 길 트고>
이에 대원군은 머리를 끄덕거려 찬의를 표하면서 이 일은 큰 일이며 또 시간을 지체할 바 아니니 내가 숙고하여 행할 터이로되 그대들은 이런 이야기를 검토 누설시키지 말라. 나의 결심이 서면 군들을 불러들일 것이니 돌아가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한다. 때에 홍봉주와 남종삼 등이 서양인의 소개에 자신 있었던 것은 실상 일본의 장기를 통하는 길이 아니고, 우리 국내에 잠입하고 있던 불인 신부와 연락하는 길이었음은 쉬 짐작할 수 있다. 어떻든 남종삼 등은 대원군의 무모한 쇄국정책을 깨우쳐 국제협력의 길을 트도록 힘을 다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당시 노국의 남하정책과의 관련에서 거의 실현될 뻔하였다.

<로인 남하 하자 불 신부와 교섭>
수백년내 바다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제정 로서아는 1860년에 청국 과 맺은 북경조약의 결과로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고 두만강 바로 건너편에 동양지배라는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톡」항을 개설하고 조선을 엿보았다. 이리하여 고종 원년 2월에 5명의 아인이 강을 경흥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대원군은 현지에서 아인과의 접촉을 엄금하도록 하명하는 한편 어떤 고관을 통하여 불국 신부들이 아인들을 무사히 물러가게 하여 주면 조선에 있어서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뜻을 주교에게 알리었다. 주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모국과 종교가 노국의 그것과 다르므로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기 어렵다고 답하였다한다.
이하 아인의 남하가 한때 주춤하다가 익 2년 9월에 다시 수10명이 강을 건너와 통상요구를 되풀이하고, 11월에는 또 3명이 건너와 강경히 요구하였으므로(일설에는 동왕 3년 1월에 그들이 배로 원산항에까지 나타났다고 하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대원군은 크게 놀라고 서울의 인심이 심히 어수선하였다.

<대원군에 영·불과 동맹 재건의>
정세가 이와 같이 급박하여지자 남종삼 등 몇몇 교인은 전년에 대원군이 주교에게 제의한 바를 상기하고 다시 교섭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먼저 김면호 홍봉주 등이 노인의 남하에 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불국 및 영국과 동맹을 맺는데 있고 이 일은 누구보다도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신부에게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내용의 건의문을 만들어 대원군의 사돈 조기진을 통하여 전달하였다. 하지만 대원군의 반응은 예상외로 냉담하였으므로 교인들은 한때 실망하였다.
그러나 다시 왕의 유모 박씨와 민모 대부인이 주선하여 이번에는 남종삼이 건의문을 지어 가지고 대원군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니 먼저 영상과 상담하라는 반응을 보이고 그 다음날에는 다시 남종삼을 불러 천주교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서양신부들이 분명히 노인의 남하를 막는 힘을 가졌다면 나와 만나도록 주선하라고 하였다. 종삼 등은 기뻐 때마침 북쪽과 남쪽에 각각 전교 차 나가 있던 베루누(장) 주교와 다부루어(안) 부주교를 급히 올라오게 하였다.

<「신교의 자유」못 이룬 채 대 박해>
12월 15일에 종삼은 대원군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리었더니 뜻밖에도 갑자기 그는 태도를 표변하여 대번 세모가 되었으니 고향에 있는 부친에게 문안이나 가라고 하면서 그 일은 그리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만나도록 하라고 냉대하였다. 대원군의 태도가 이와 같이 급변하게 된 까닭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아인의 침입이 뜸해져 점차 퇴거해 가리라고 전망한 위에, 그때에 북경에 갔던 동지사 일행이 중국에서도 천주교도를 크게 박해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는데 말미암은 듯하다.
어떻든 위와 같은 경로를 겪어 신교의 자유를 얻으리라는 희망은 하루아침에 무서운 박해로 변하였다. 동년 12월말부터 천주교도의 동태를 극력 감시하던 끝에 무자비한 박해가 전개되었다. 때마침 부친에게 세배차 고향 제천에 내려갔던 남종삼은 상경하던 도중 다음해 1월 15일에 .고향 땅의 어느 주막에서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무모한 쇄국정책을 말리어 국제협력의 필요와 그 방책을 제시한 남종삼은 50세를 일기로 동월 21일에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이슬로 사라졌을 뿐 더러 83세의 고령이던 그 부친 남상교를 포함한 약 8천여명의 교인이 이후 6년간에 걸쳐 온갖 희생을 감수하여야 하였던 이른바 병인 대 교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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