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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차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무슨 일에든지 말참견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시민사회의 공통적 심리이다. 경제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경제의 원뜻인 「경세제민」의 철학을 풀이하기 까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곧잘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에 열을 올린다.
모든 것이 돈(경제)에 의해 지배되고 돈 문제로 귀착하기 마련인 세태의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말 많은 것이 그 경제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그 경제문제에 관한 술어 쳐놓고서 어느 것 하나 만인이 얼른 승복할 수 있을만한 확실한 정의가 있는 예는 드물다. 일례를 들어, 모든 경제행위의 당면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빈곤의 추방」이란 말만해도 그렇다.
우리처럼 그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국민도 드물겠지만, 막상 그 빈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따진다면 좀처럼 해서는 얼른 대답이 안나올 경우가 많고, 따라서「중구난방」의 한탄이 저걸로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이란 필경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올해 대통령교서는 70년대에 가서 이룩될 가난의 추방과「위대한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영국정부의 올해 시정목표 중에도「가난의 추방」(Campaign for the Poor)이란 항목이 끼어있어 주목을 끈다.
『인도인에게 있어 가난이란 거처할 집이 없어, 일가족이 노두에서 잠자는 상태를 말한다. 서전사람들에겐 세 어린이들이 방 하나를 차지하면 벌써 가난의 범주 속에 든다.「탄자니아」 주민들에겐 식구마다 강냉이 죽 한 그릇, 이태리농부에겐「스파게티」속에「치즈」를 섞어 먹지 못할 만큼의 상태. 영국인에겐 한 침상을 세 어린이들이 공용하는 상태』라는 정의가 있다.
지금 1백23불의 국민소득을 가진 한 국민이 위대한 사회속에 살 때 2백불 이상의「풍요」를 구가하게 될 것은 틀림없지만 그때 과연 우리의 빈곤의 척도는 무엇이 될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가난의 문제가 어느 사회에서나 중대한 사회변화의 원동력이 될 만큼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러기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경제문제를, 입방귀에 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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