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읽기 몰린 키프로스, 다시 예금 과세 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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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은행들의 연쇄 파산과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한 키프로스가 예금 계좌에서 일괄적으로 돈을 떼어내 공적자금으로 쓰는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정부가 연금 등을 통합해 국가기금을 마련한 뒤 이를 우선 구제자금으로 쓰는 긴급 방안을 마련했지만 유럽중앙은행(ECB) 등의 반대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BBC 방송 등에 따르면 키프로스 정부와 의회는 이번에는 10만 유로(약 1억4400만원) 이상을 넣어둔 예금자에게만 1회성 세금을 물리기로 했다. 과세 비율은 부실 규모가 가장 큰 ‘키프로스 은행’의 예금주에게는 20%를, 나머지 은행 예금주에게는 4%를 적용할 계획이다. 키프로스는 당초 은행에 차별을 두지 않고 10만 유로 이상에는 9.99%, 그 미만에는 6.75%의 세금을 매기려 했으나 지난 19일 의회에서 거부됐다. 키프로스의 전체 예금 계좌 중 10만 유로 이상이 든 계좌는 약 55%다.

 키프로스를 제외한 유로존(유로화를 통화로 쓰는 나라) 16개국이 새 방안을 받아들이면 일단 급한 불은 끄게 된다. ECB는 25일까지 키프로스가 58억 유로(약 8조3700억원)의 자체 구제자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자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ECB의 지원이 끊기면 키프로스 은행들의 도산이 시작된다.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24일 오후 6시(한국시간 25일 오전 2시)에 벨기에 브뤼셀에 모여 키프로스가 제시한 새 계획에 대한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니코스 아나스티아디스 키프로스 대통령도 선처를 호소하기 위해 참석한다. 동의가 이뤄지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이 100억 유로의 구제자금을 지급한다.

 예금자에 대한 세금 부과 방안으로 ‘파산 시한폭탄’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경제가 정상화되기는 어렵다.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우선 예금 대량 인출 사태인 ‘뱅크런’이 예상된다. 돈이 은행에서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예금주들의 반발도 거세다. 이들은 은행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될 운명에 처한 은행원들과 뒤섞여 23일 수도 니코시아에서 시위를 벌였다. 관련국 간의 마찰도 예상된다. 러시아는 자국민의 키프로스 계좌에 대한 과세에 반대하고 있다. 키프로스 은행에는 약 300억 유로의 러시아계 자금이 들어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러시아 정부는 키프로스에서 자국민과 기업들이 돈을 떼이면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독일 기업의 자산을 동결시키거나 세금을 올리는 방법으로 독일에 대한 보복을 가할지 모른다고 보도했다.

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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