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 이항대립, 아시아 삼항순환으로 극복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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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덴마크 출신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만든 가문의 문장(紋章). 태극 문양이 보인다.

문예부흥 이후 근대 유럽문화는 동전 던지기 같은 이항대립(二項對立)적 선택과 택일의 사고에 의해 주도돼 왔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을 이끌어 온 사고방식은 가위바위보와 같은 삼항순환(三項循環), 즉 가위는 보를 이기고 보는 주먹을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기며 때로는 비기기도 한다는 사고였다.

 근대를 초극하려 한 유럽은 조화와 상보가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는 아시아적 미학과 사상에 주목해왔다.

 과학에서는 닐스 보어(1885~1962), 영화에서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이 그 예다. 양자물리학의 아버지 보어는 노벨상 수상 후 태극 도형을 가문 문장으로 삼았다. 태극 위엔 ‘대립은 곧 상보(contraria sunt comprimanta)’라고 적었다.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은 세 폭 족자로 비대칭 순환구조를 만드는 아시아 미학을 이용해 15세기 러시아 이콘화의 거장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삼위일체’의 구도를 분석, 자신의 영화문법으로 만들었다. 저커버그의 페이스북이나 스티브 잡스의 인터페이스 혁명 역시 이항대립을 삼항순환 구조로 바꾸는 창조적 사고라 할 만하다.

 이들은 기술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을 발견한 것, 바다와 육지 그 사이에 눈을 돌려 새로운 세계를 연 거다. 닫힌 주먹과 열린 보자기, 열렸으되 닫힌 것,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것, 그것이 바로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잇는 디지로그적 발상이다.

 한국은 대륙과 섬의 반도, 즉 가위다. 존재에서 생성으로 역동적인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창조적 긴장과 그 조화를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한국에선 산업화의 경제 원리인 자유와 민주화의 정치 원리인 평등의 두 세계가 대립·양분·갈등해왔다. 이것을 문화 원리인 생명화의 공감, 즉 박애로써 융합하는 삼항순환의 창조력이 절실하다.

 아시아 시대의 문명을 여는 키워드는 서구문명을 발전시켜 온 이항대립의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배제적 사고를 삼항순환의 ‘이것도 저것도’의 포함적 사고로 바꾸는 것이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라. 예수의 왼손은 가위바위보의 보와 같이 열려 있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관용을, 오른손은 손등을 보이는 주먹에 가까운 형상으로 거부와 징벌(유다의 배신)로 이항대립의 구조다. 그러나 이 두 손이 팔을 타고 올라가 예수의 얼굴로 통합된다. 그 모순의 이미지가 창문의 빛을 타고 승화한다. 대립이, 상보하는 사랑에 의해 지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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