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 배우 장동건 밤거리에서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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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지난 일요일 밤 영화배우 장동건(30) 과 소설가 김영하(34) 가 광화문 앞에서 만났다.

짙게 깔린 어둠 너머로 야간 조명을 밝힌 광화문. 6년 전 헐린 조선총독부 건물 대신 저 멀리 윤곽만 드러낸 인왕산이 세종로 큰길을 내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장동건이 주연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1일 개봉) 를 실마리 삼아 영화와 문학을 논했다. 이번 영화는 2009년에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가상의 역사'속에서 조선계 형사와 일본인 형사의 우정과 배신을 현란한 액션로 풀어가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물론 영화 속에선 조선총독부가 엄존한다.

▶김영하=세상 많이 달라졌죠. 영화의 아이디어가 된 복거일씨의 『비명을 찾아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유예요. 소설 속의 경성(京城) 은 계엄상태였죠. 영화 속의 경성은 자유분방하잖아요. 소설과 영화의 메시지가 전혀 다른 것이죠. 교과서 왜곡 파동.월드컵 공동 개최 등 한.일관계에 대한 재정립이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영화가 말하려는 게 뭘까요.

▶장동건=사실 깜짝 놀랐어요. 개봉되기 전부터 친일영화다, 반일영화다 하는 논쟁이 인터넷에서 일었는데 영화 내용과는 큰 관계가 없어요. 국가.민족보다 개인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죠. 영화의 사회적 영향력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김영하=그래도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 기자가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래요.

▶장동건=처음부터 양국 관계를 고리타분하게 다루지 않으려고 했어요. 낡은 독립군 영화처럼 보이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히려 주변에서 없는 쟁점을 만드는 건 아닌지…. 참신한 상상력과 감동적 재미를 갖춘 블록버스터의 정신을 보여주려고 했죠.

▶김영하=개인적으로 민족주의.국수주의를 싫어합니다. 우리 민족을 우월하게, 다른 민족을 괴물처럼 설정하는 건 온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영화는 순진하고 우직해요. 그래서 민족.국가보다 가족.우정이 부각되지 않았을까요.

장동건이 말문을 돌렸다. 사이버 논쟁에 물린 까닭인지 상호비방이 난무하는 인터넷의 폭력성을 꺼냈다.

김영하는 1990년대 초 PC통신에 글을 쓰기 시작해 국내 작가론 거의 처음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등 대중과의 소통을 널리 시도한 작가. 노랑머리 염색에 귀고리까지 언뜻 보면 배우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그의 대답이 이채롭다. 뜻밖에 그만의 스타론을 펼친다.

"지난해 저도 개인 홈페이지를 폐쇄했죠. 그렇다고 인터넷의 부정적 측면만 볼 이유는 없어요. 그보다 당신 같은 스타는 대중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요. 고독해야 한다는 뜻이죠. 저는 친절한 배우를 높게 보지 않아요. 대중의 일희일비에 좌우되면 안되죠. 프랑스 학자 에드가 모랭이 『스타』에서 지적했듯 스타는 연기력보다 자신만의 취향, 혹은 지적 깊이를 키워야 해요."

장동건이 공감한다. 매니저에게 책 이름을 적어두라며 분위기를 돋운다.

"제가 그리는 이상적인 배우형입니다. 특히 저처럼 배우보다 스타란 딱지가 먼저 붙은 경우는 더욱 그래요. 한국 사회는 스타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책임감마저 부가하죠. 저는 절대 배우가 공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장동건의 이 말을 다시 김영하가 받았다.

▶김영하=로버트 드 니로를 봐요. 대중과의 접촉을 줄이고 책을 많이 읽죠. 또 잭 니컬슨은 어때요. 성질은 '더럽게' 보이지만 호감이 가지 않아요. 저도 장동건씨가 그런 '불길한 매력''고급적 호감'을 갖춘 배우 됐으면 해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톰 크루즈처럼 한국형 흡혈귀 영화에 어울리게 말입니다.

▶장동건=많이 배우네요. 영화 에세이집 '굴비 낚시'를 내셨죠. 시나리오도 썼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글쓰기와 연기는 비슷한 게 많아요. 배우도 무척 외롭거든요. 카메라 앞에 서면 홀로 있는 느낌이죠.

얘기가 문학쪽으로 넘어갔다.'친구' 이후 인기 정상에 올라선 장동건과 '튀는' 감성으로 우리 시대 젊은 작가를 대변하는 김영하. 선뜻 섞일 것 같지 않으면서도 대화는 물 흐르듯 진행됐다.

▶김영하=뭐랄까. 글쓰기나 연기는 작은 권력욕이라고 봐요. 무언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타인에게 말을 걸려는 행동이죠. 특히 배우들은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결국 변화하는 인물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시나리오를 보는 눈도 생기구요.

▶장동건=어려서부터 일기를 써왔어요. 그런데 가끔씩 놀래요. 혼자 보는 일기 속에서도 저를 멋있게 묘사할 때가 있거든요. 『무소유』의 법정스님을 좋아하는데, 그런 스님은 왜 글을 쓸까 의심한 적도 있어요. 그만큼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을까요.

"그럼요, 그래서 배우들도 주연을 희망하지 않겠어요"라고 김영하가 답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웬만한 추리소설을 다 읽었다. 최근엔 이런저런 글을 끄적대기 시작했다"는 장동건의 말을 듣고 "부디 나이가 들어서도 추리소설을 놓지 않는 '취향'있는 배우가 되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헤어질 무렵 김영하가 자신의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선물하자, 장동건은 이번 영화의 배우일기가 들어 있는 '메이킹 북'으로 답례했다.

영화배우와 소설가의 '크로스 오버'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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