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스페인 현대사 블랙 코미디로 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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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은 40년 동안 프랑코의 독재 밑에서 살아왔다. 프랑코는 내가 스무살 때 사망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최근의 일이다. 더 이상 자유를 잃고 싶지 않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꿈속의 여인'(광화문 시네큐브)의 페르난도 트루에바(47)감독은 "사랑을 다루는 영화에서도 정치적 성향이 느껴진다"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트루에바는 현대 스페인 영화계를 주도하는 감독. 고단했던 스페인 현대사를 주로 블랙 코미디에 담아왔다. 1992년 국내 개봉된 '아름다운 시절'은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프랑코 정권과 공화국 정권 사이의 과도기를 살아간 부유한 아버지와 각기 성격이 다른 네명의 딸을 통해 시대의 부조리를 풍자했다.

'꿈속의 여인'도 비슷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의 협조를 받아 독일에 영화를 찍으러온 스페인 영화 제작진을 내세워 전제 정권 속에서 죽어가는 예술혼을 꼬집고 있는 것.

스페인의 '정치적' 영화는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하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몸살을 앓았던 지난 세기의 경험에서 적지 않은 닮은꼴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선보인 '마리포사'(호세 루이스 쿠에르다)도 국가주의자와 공화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인간성 상실을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꿈속의 여인'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스페인 최고의 영화배우 마카레나(페넬로페 크루즈)가 스페인 감독.독일 장관을 뿌리치고 유대인 서커스 단원을 연인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무슨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

트루에바 감독은 서면 인터뷰에서 "스페인 사람에겐 유대인과 아랍인의 피가 섞여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아랍인.기독교인.유대인이 평화롭게 공존했던 때였다.

마카레나가 나치의 장관보다 유대인 죄수와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마음이 시킨 것을 따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수긍이 갔다.

블랙 코미디를 애용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생각하는 코미디의 매력은 무엇일까. 트루에바 감독은 "내 작품엔 항상 유머가 있다.'아름다운 시절'과 '꿈속의 여인'은 비극적 코미디다. 유머는 인생을 바라보는 한 방식이다.

삶이 아무리 비천할지라도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데뷔작 '오페라 프리마'(80년) 개봉 당시 극장에서 웃어대는 관객들을 목격했다. 마술을 보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후 코미디를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런 색깔 때문에 '꿈속의 여인'은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연상시킨다. 극단의 절망마저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페이소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스페인 감독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했다. 영화의 '민족주의'를 배격한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그는 "내 조국은 세계다. 스페인적으로 불리는 문학.음악.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9천9백99편의 스페인 영화보다 일본 감독 미조구치 겐조의 '우게치 이야기'를 더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로맨티스트 기질이 농후하다"는 물음에 그는 "맞다. 그게 내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다"라고 맞받았다. 그리고 오드리 햅번.리타 헤이워스.잉그리드 버그먼.캐서린 햅번.그레타 가르보 등 그가 좋아했던 여배우를 20여명이나 줄줄 댔다.

트루에바는 그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였던 프랑수아 트뤼포를 꼽았다. 10대 중반 트뤼포의 '두 영국 여인'을 보고 감독이 되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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