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시장 국가장벽 무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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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 콜센터 대행업체인 소스원의 필리핀 마닐라 사무실.

7백50명의 20대 젊은이가 컴퓨터 스크린에 몰두해 있다. 이들은 미국에서 신용카드로 기름을 넣은 셰브론텍사코의 고객과 복잡한 소프트웨어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전세계 마이크로소프트 고객들과 통화 중이다.

'콜센터'는 미국에선 지루하고 장래성 없는 저임금 업종이지만 필리핀에선 인기다. 현재 1만명의 필리핀 대졸자가 45개의 다국적 기업 콜센터에서 월 2백50달러(초임 기준)를 받으며 교대로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일하고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이스트먼 코닥.인텔.델 등이 저임금과 세금 혜택 등을 노려 영어권인 필리핀에 콜센터를 설치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보잉사 디자인센터. 1998년 설립된 연구소로 7백명의 러시아 항공 분야 엔지니어가 날개 등 비행기 주요 부품을 설계한다. 석사 학위 소지자인 이들의 월 임금은 6백50달러로 미국 엔지니어(월 6천달러)와는 비교가 안된다.

때문에 미국 시애틀 본사의 엔지니어들은 좌불안석이다. 이미 2001년 이후 회사 측은 5천명의 미국인 엔지니어를 해고했다. 급기야 보잉사 노조는 지난해 12월 러시아 법인을 축소하지 않으면 파업하겠다고 선언했다. 보잉사의 미국과 러시아 엔지니어가 직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새로운 '냉전(Cold War)'에 돌입했다.

#인도 방갈로르 공항 근처의 위프로사(社). 인도인 방사선과 전문의 5명은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환자들의 컴퓨터단층촬영(CT) 필름을 매일 30장씩 분석한다. 방갈로르의 인포시스 연구소에서는 2백50명의 인도인 엔지니어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인도 최고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들은 이제 미국의 실리콘 밸리가 아니라 방갈로르로 향한다. 인텔.휼렛패커드 등 선진 기술을 자랑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연구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인도에는 7천5백명의 반도체 설계 디자이너가 연봉 8천~1만달러(초임 기준)를 받으며 근무 중이다.

다국적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이 고급 노동시장의 국가 간 장벽을 급속히 무너뜨리고 있다. 20여년 전 다국적 기업들은 저임금을 찾아 신발.장난감 등 노동집약적 제조 공장을 개발도상국으로 옮겼고, 이후 단순 서비스 영역을 아웃소싱했었다. 이제는 정보기술(IT) 전문가나 금융 애널리스트 등 고도의 지식기반 부문에서도 국제적인 아웃소싱 붐이 일고 있다.

중국은 제너럴 일렉트릭(GE).인텔.필립스.마이크로소프트 등의 주요 생산기지로 떠오르고 있으며, 하드웨어 디자인과 응용 소프트웨어에도 강하다.

필리핀에는 8천개 이상의 외국 기업이 9개의 정보기술 산업단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영어권이라는 게 강점이며, 소프트웨어 및 그래픽 디자이너.건축사.텔레마케터.회계인력 등의 공급센터로 각광받고 있다.

역시 영어권인 인도는 정보기술과 반도체 설계.콜센터 등으로 1백억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으며, 2008년까지 이 부문의 외화 수입이 5백70억원에 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과학과 IT 분야를 전공한 석.박사들이 넘쳐나는 러시아는 다국적 기업들의 연구개발(R&D)센터로 급부상하고 있다.

멕시코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미국 기업의 IT 및 엔지니어링 분야 아웃소싱 지역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코스타리카는 저렴한 통신비 등으로 미국와 유럽의 스페인어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콜센터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고급 인력의 아웃소싱이 가능해진 것은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본사와의 정보 교환에 걸림돌이 없어졌고 중국.인도.러시아 등 개도국 대학에서 최신 기술을 습득한 고급 인력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 위크 최신호(2월 3일자)는 이 같은 추세 때문에 2015년까지 적어도 3백30만개의 화이트 칼라 일자리와 이들이 벌어들이는 1천3백60억달러의 임금이 미국에서 개도국으로 이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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