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교수 꿈꾸다 축구박사 된 이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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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 해설위원이 20일 서울 목동 자택에서 축구공을 들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박종근 기자]

‘축구 선수보다 유명한 괴짜 해설가’ ‘샤우팅 해설의 대가’.

 국내 축구팬들이 한준희(43) KBS 축구해설위원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한 위원은 방대한 축구 지식과 특유의 고음을 앞세운 독특한 축구중계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한 위원은 외모만 보면 대학교수나 연구원 이미지다. 실제로도 교수가 될 뻔했다. IQ 155인 그는 중학교 때 모의고사에서 서울시 전체 1등을 한 적도 있다. 서울대 해양학과 출신인 그가 어쩌다 축구해설가로 나서게 됐는지 궁금해 지난 20일 서울 목동의 자택을 찾았다.

 한 위원은 “7살이던 1976년 대통령컵 말레이시아전을 보고 축구에 꽂혔다. 차범근이 1-4로 뒤진 종료 7분을 남기고 기적의 해트트릭을 해내 4-4로 비긴 경기”라며 “축구 명문 동북중과 중동중을 다닌 시기에 수퍼리그 할렐루야와 대우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말했다. 유럽 축구에도 흠뻑 빠졌다. 한 위원은 “ 디에고 마라도나(53·아르헨티나), 조지 베스트(영국·타계) 등의 영상 자료를 구해 봤다. 하루에 축구 4경기를 봤으니 중독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한 위원은 대학 3학년 때 과학철학에 심취해 철학 교수를 꿈꿨다. 서울대에서 과학철학 석사를 딴 뒤 200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 앰허스트 철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축구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지만 미국은 축구 변방이었다. 한 위원은 “FOX TV 등을 통해 매일 잉글랜드·브라질 등 해외 축구를 봤다. 심심해서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 ‘사커라인’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 글들이 한 위원을 해설자의 길로 인도했다. 축구팬들은 한 위원의 전문가 뺨치는 글에 열광했다. 사커라인 운영자는 축구 커뮤니티 사업을 제의했다. 한 위원은 장고 끝에 2002년 귀국길에 올랐고, 이듬해 MBC에서 해설 제의를 받았다. 박지성(32·QPR)과 이영표(36·밴쿠버)가 뛰던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경기 중계로 해설에 입문했다.

 한 위원은 ‘게리 네빌(38·은퇴)과 필립 네빌(36·에버턴)은 형제’처럼 축구 매니어라면 거의 다 아는 정보가 아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해설로 이름을 알렸다. TV 중계화면에 비친 은퇴 선수, 심지어 스페인 국왕과 동행한 요르단 국왕까지 알아맞히는 내공을 자랑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목소리가 커지면서 갈라지는 샤우팅 해설은 시청자들에게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2005년 KBS와 인연을 맺은 한 위원은 요즘 9시 뉴스 앵커보다 KBS에 더 자주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비바 K리그’와 ‘운동화’ ‘스포츠 중계석’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축구해설 외 활동도 왕성하다. 라디오 ‘가요광장’에서 걸그룹 EXID 솔지와 역할극을 한다. 개봉 예정인 영화 ‘배우는 배우다’에 카메오로도 출연했다.

 한 위원은 요즘도 축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날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중계를 위해 A4 용지 100장이 넘는 양을 프린트해 준비하고 있었다. 스포츠 마케팅 쪽에서 일한 부인 손주연(41)씨는 든든한 조력자다. 한 위원은 “해설은 선수 출신이 하는 게 맞다. 비선수 출신 해설가는 직접 경험에서 한계가 있다”며 “한 경기라도 더 분석하는 것만이 비선수 출신 해설가의 의무이자 최소한의 존재 요건이다. 끊임없는 공부만이 살길이다”라고 말했다.

글=박린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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