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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5년만에 속세 다녀간 김일엽 스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대나무 숲이 아담스럽게 담장을 이루고 또한 이끼 끼인 조그마한 바위돌이 올망졸망 잘 조화되어있다. 예산군 수덕사의 조그만 암자, 환희단. 뒤엔 병풍처럼 깎아지른 덕승산이 늘어섰고, 앞으론 황해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합창하는 암자에서 김일엽 스님은 기관지천식에 겹친 독감과 싸우면서 사색에 잠겨있다. 입산 35년만에 처음 산을 내려 서울 중앙의료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지도 어언 한달-
『「센터」에서 깨친바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신문명의 지배자가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게된 것이 나는 수치스러웠고 슬픔마저 느꼈습니다.』 일엽 스님은 비록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었으나 『혼탁한 현세를 구제할 길은 이것이 아니었음을 깨쳤다』고 했다.
『지금 이 세상엔 인간을 다스리는 세 가지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육체를 위주로 하는 학교가 있고, 둘째 정신을 다스리는 종교가 있어요. 셋째는 혼 속에 다시 존재하는 순수한 혼으로 이것을 내적 생의 진리로 삼습니다. 이것을 내가 언어로 표현하면 이미 물질화하기 때문에 나만 알지요. 오직 내(아)가 알고 빈천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유일한 길이며 종교입니다. 소위 줗출구의 진리라는 것이 이것이지요.』
겹친 병환으로 간호스님의 근심을 사온 일엽 스님은 방문객의 면회를 일절 사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선생들이 돌아간 다음 내가 몇 배 더 앓는 경우가 있어도 말하고 싶다』면서 굳이 일어나 앉아 열띤 말을 이었다.
『민중당당수 박순천씨가 찾아왔더군요. 그때 순경얘기를 했지요. 산적을 만난 순경은 싸우다가 죽어요. 도망은 바로 비겁이니까. 나는 정치는 모르지만 정치를 한다면서 감정과 이해관계로 서로 물어뜯고 싸운다니 말이 됩니까. 죽은 순경의 경우를 순직이라 하잖아요. 이 정신을 잊지 말라고 말했읍니다…. 』
독감의 탓일까, 일엽 스님은 홍안미소년처럼 홍조를 띠었다. 아직도 붉은 입술로는 흐르는 물처럼 말이 샘솟는다.
『이 나라에 장부가 이다지도 없는가. 때문에 여자가 당수가 되었지요. 사내가 황새라면 여자는 뱁새. 뱁새가 황새를 따르자면 그만큼 빨리 발을 놀려야 합니다.
이효상씨가 찾아왔을 때도 괴로운 지위지만 참고 나아가라고 권고했습니다.』
한간쯤 되는 작은 방엔 이불 두 채와 방석 세 개 뿐, 너무나 단조롭다. 40년 전 이 나라 개화기에 숱한 공헌을 한 당대의 신여성이며 시인이던 김일엽 스님은 오늘 법명도 「김일엽」으로 속세의 추악한 욕망을 뛰어넘은 나(아)의 발견자가 되었다. 『혼속의 혼이란 무엇인가.
내마음(아심)을 내(아)가 쓰는(사) 것. 내생(아생)을 내(아)가 책임지는 것. 때문에 인간은 내생(아생)을 포기할 수 없는 것. 「그리스도」교의 천당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 설사 지옥에 가더라도 내 마음을 내가 쓰면 이에서 독립하여 초월할 수 있다. 이 힘의 원천인 순수한 혼은 불멸. 인간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선 내 마음을 내가 써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부처뿐인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쓸 때까지 부처를 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하렵니다-.』
35년 전의 경성과 병원에 가면서 본 오늘의 서울이 얼마나 변했던가-. 『나는 나의 세계가 있을 뿐, 나의 공부만 생각할 뿐 속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은은한 목탁소리와 경건한 불경소리가 덕숭산의 놀을 타고 울려 퍼졌다.
고요히 두 손을 모은 일엽 스님의 안경 속에 빛나는 맑디맑은 눈동자는 35년이란 긴 세월을 고독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생존의 의미를 향해 달려온 순화한 한 여인의 영혼이 투영되어 있었다.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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