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 체포 이희건씨는…] 재일한국인'돈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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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건(李熙健)전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재일동포사회의 중심축이었다. 그가 재일동포의 경제기반을 닦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 대해선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일본에서 금융사각지대로 홀대받던 동포사회의 자금줄 역할을 하면서 간사이(關西)지역 재일동포들의 경제기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또 외화가 아쉽던 시절 한국으로 동포들의 돈을 끌어오기도 했다. 신한은행을 세우는가 하면 서울 올림픽 때에는 지원금 모금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급격한 금융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는 재일동포 1세다. 일제시절 경상도에서 태어나 상경한 그는 일본인 가게의 점원으로 생활하다 1932년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大阪)로 갔다. 돈 없고 배운 것 없는 그는 단순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각고의 노력끝에 대학을 졸업했다.

해방 후에는 잔류동포들이 많이 살던 오사카시 쓰루하시(鶴橋)시장의 무허가 점포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시작했다. 동포상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상점가동맹을 조직,30세에 초대회장이 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동포상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면서 동포사회의 리더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또 금융의 중요성을 절감한 것도 이 무렵이다. 많은 영세상인들과 접하면서 동포들의 금융기관이 없이는 경제기반을 다지기가 어렵다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55년 동포사회 유지들과 오사카흥은이라는 신용조합을 설립했다. 일본 정부가 무허가 고리대금업을 양성화한다는 차원에서 지역별로 하나씩 상은(商銀)이라는 이름으로 민족계 신용조합 설립을 허가해준 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오사카흥은만이 유독 '흥은'이 된 것은 원래 오사카상은이 별도로 설립됐으나 李전회장이 악착같이 별도의 신협 설립을 주장하는 바람에 기존 신협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당시 별도 신협을 허가해 달라는 李전회장의 집요한 요청에는 대장성 관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후문이다.

56년 오사카흥은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경영수완을 발휘, 오사카지역에서 가장 큰 신협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68년엔 수신고 1백억엔을 돌파했고 93년엔 간사이지역 5개 신협을 합병해 간사이흥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보통은행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국내투자에도 적극적이어서 77년 재일한국인 본국투자협회를 조직한 데 이어 같은 해 동포들의 출자를 모아 제일투자금융(98년 퇴출)을 설립했다. 이어 82년 7월에는 신한은행을 설립해 교민은행 설립이라는 동포사회의 숙원을 풀었다.

李전회장은 80년대 초 은행설립을 위해 전두환(全斗煥) 전대통령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당시 李전회장이 全전대통령에게 봉투를 건네자 全전대통령은 "李회장 통이 매우 크군요.요즘 재벌들은 도대체 소심해서…"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일본의 장기불황으로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그의 회사도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98~99년엔 동포신협의 단체인 한신협의 회장 자격으로 전체 동포신협을 간사이흥은 중심으로 통합하려 했으나 의견대립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대출기업의 도산과 부동산 담보가치의 하락으로 2000년 12월 결국 도산을 맞게 됐다.

李전회장이 금융시장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 것을 그의 노욕 탓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특히 간사이흥은이 궤도수정을 하지 못한 채 부실화한 데에는 장남인 이승재(李勝載)전부회장과의 깊은 갈등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0년대 들어 李전회장은 한 때 승재씨에게 간사이흥은의 경영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도쿄(東京)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승재씨가 부친과는 달리 과감한 경영개혁을 시도하자 부자간 대립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의 경영노선을 부정하는 쪽으로 내달으려고 하자 李전회장이 다시 경영일선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그후 李전회장은 장남을 사실상 파문하고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했다. 또 심복을 시켜 철저하게 감시토록 했다고 한다. 심지어 승재씨의 통화내용은 모두 李전회장에게 보고된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유폐생활을 강요 당한 승재씨는 '사도세자'로 불릴 정도였다.

李전회장이 결정적으로 노욕에 집착한 모습은 동포신협의 부실화 문제가 서서히 불거지던 99~2000년이다. 동포신협을 통합해 은행을 만들자는 구상이 한국 정부에서 제기돼 긴박하게 돌아갈 당시 李전회장은 한국 정부에 자신을 지원해주면 동포신협을 한 데 통합해 은행으로 키우겠다고 고집한 것이다.

당시 정부가 부실화에 책임이 있는 李전회장을 더 지원하기 어렵다는 뜻을 보이자 李전회장은 정부와도 대립했다. 그러는 동안 동포신협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모처럼의 통합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일본 정계의 원로들이 하나 둘 사라져간 것도 李전회장의 몰락에 큰 영향을 줬다. 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총리가 2000년 타계하자 일본 정계에서도 기댈 만한 곳이 없어졌다.

90년대만 해도 李전회장이 오사카에서 도쿄(東京)에 올라오면 다케시타 전 총리를 찾은 뒤 대장성 사무차관이나 국장급을 면담했으나 도산 직전에는 계장급 면담으로 격이 떨어졌다고 한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yh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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