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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개 마음은 땅개가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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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까마득한 시절, 군가가 있었다. 코흘리개 시절, ‘얼룩 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라는 파월 군가를 따라 불렀다.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에 직접 참가했던 노년 세대와 달리 지금의 기성세대는, 유년 시절 간간이 전해 오는 파월 국군의 무용담을 통해 전쟁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가 열대 정글 어디에선가 베트콩을 수백 명 사살했다는 등의 뉴스와 더불어 전쟁은 점차 한국인에게 익숙해져 갔다. 그런 뉴스에는 대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풍기는 야자향과 함께 한반도 청년들의 살점 떨어지는 소리, 피비린내가 풍겨져 나왔다.

 그러나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지금의 기성세대에게 그 시절 월남은 일정 부분 이국 정서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베트남 종전 소식은 어린 나에게 가장 아쉬운 사건이 된다. 정치나 이념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 나는 커서 사관학교나 ROTC를 통해 해병장교로 월남에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 꼬마들에게 공공연히 나중에 청룡 부대장으로 전장에 나갈 것이라고 뻥을 쳤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속에 매스큘리즘(masculism·남권주의)이 상당한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나는 영화도 ‘지옥의 묵시록’ ‘디어 헌터’ ‘플래툰’ 등과 같은 전쟁 영화를 좋아하고 “정의로운 폭력”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호감을 가지는 편이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월남전은 끝났고, 철들어서는 월남전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종전으로 인해 나는 꿈꾸던 장교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병장으로 제대한다. 파월 전투 부대장으로서의 꿈은 당연히 추억으로 퇴색된다.

 뜬금없이 군대 얘기를 떠올리는 것은 서서히 두려워지는 전쟁 위협 때문이다.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북한 관련 뉴스는 아들 가진 부모들을 불안케 한다. 대한민국은 국민개병제 국가, 모든 국민은 병역의 의무가 있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군은 한국 남자들에게 경원의 대상이다. 현역에서 빠지거나 아니면 방위병으로, 또는 편하다는 카투사로 빠지려는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현역 제대가 자랑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어둠의 자식들’로 취급받기도 했다. 실제로 결혼 초 아내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는 “왜 자기만 현역 제대 했느냐”는 것이었다. 아내의 친구 남편들은 현역 출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했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실제로 이번 공직자 검증 과정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군대가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만 가는 곳처럼 바뀌고 있다.

 그런 감정은 내 세대에서는 대개 비슷하다. 방송사 고위 간부로 있는 나의 늙은 제자는 취하면 군번은 물론이고 총기번호, 가늠자 숫자까지 목청이 터져라 외친다. 그런 그가 재미있어 어쩌다 ‘방위 출신 아니냐’고 놀리면 폭발하는 그의 신산했던 전방 얘기에 술자리가 숙연해진다. 그런 밤, 귀갓길 나도 가만히 읊조려 본다. “신고합니다. 병장 김동률은 ○○○○년 ○월 ○일 보병 제○사단으로부터 보병 제○○예비사단으로 전역을 위한 전출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가끔 취하면 혼자 되새겨 보는 청춘의 소리다. 정말이지 난 평생토록 이 신고만큼 감격스러웠던 기억은 없다. 휴머니즘을 포기한 지긋지긋한 내무반 생활, 고향 생각 안 나게 해주겠다며 명절만 되면 등장하는 친절한 구타 등등…군 시절을 되새기면 떠오르는 우울한 기억들이다. 그래서 군대의 기억은 오랫동안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젊은 날의 상처로 휴화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아, 힘 없고 돈 없고 능력 없는 사람만 군대 가는 것은 아니다. 푸른 옷에 꽃다운 청춘을 실어 보낸 수많은 ‘대한민국 국군’이 있고, 아버지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달려오는 교포 청년도 있다. 간교하게 피해간 권력자들도 있지만, 힘든 시절을 마다 않고 이 순간도 군문을 두드리는 젊음도 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북한의 위협이 전해지는 오늘, 저열하고도 무능한 정치권을 지켜보는 전후방 땅개들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땅개 마음은 땅개가 안다.”

※땅개=보병 소총수.

김 동 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