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세계경제] 4. 중동전쟁, 석유의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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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제 대공황의 길로 접어든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원치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을 피하기보다 이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괴로운 표정의 CNN 아나운서는 뉴스를 계속 진행하고, 화면에 등장한 전문가는 "세계경제 패권은 일본이나 독일로 넘어갈 것이며 오일달러의 영향력은 훨씬 커질 것"으로 진단한다.

알란 J.파큘라 감독의 1981년 작 '화려한 음모'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70년대 오일달러를 소재로 한 거의 유일한 영화라는 점, 세계 금융계의 이면을 파헤쳤다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영화는 미국의 금융인들이 오일달러로 주가와 환율 조작을 일삼는 내용으로, 아랍인들이 갑자기 자금을 빼내갈 경우 세계는 공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경고도 담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79~80년, 미국 경제에 위기감이 고조될 때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인플레와 실업률은 '화려한 음모'가 생성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원제 롤오버(Rollover)는 만기연장이란 뜻이다.

60년대 미국의 중동전략은 2원화돼 있었다. 이스라엘을 미국의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한편 몇몇 중동국가를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로 만들기를 원했다. 아랍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미국은 이들 나라에 군사지원을 확대했고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중동 석유는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높아졌다. 세계 석유시장에서 중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46년 9.4%에서 73년 43.6%로 뛰어올랐다. 전세계가 중동 석유에 목을 맨 상황이었다.

생산원가가 낮다는 점도 중요했다. 미국에서 배럴당 1.75달러였던 생산원가는 중동에서 6센트에 불과했다. 산유국에 세금과 이익금을 적게 준 결과로 선진국들은 70년대 초까지 유가를 배럴당 2달러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비아의 가다피가 이 모든 걸 바꿔버렸다. 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는 유가인상을 밀어붙인 동시에 유전개발에 참여하는 외국기업들로부터 세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석유 없이 5천년을 살아왔다. 앞으로도 석유 없이 살아갈 각오가 돼 있지만 선진국들은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가다피의 이같은 배짱은 잘 먹혀들어갔고, 산유국들은 여기에 고무됐다. 60년 결성된 후 별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던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활기를 찾았고, 마침내 유가인상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석유생산 이래 처음으로 중동국가들이 시장을 장악했던 것이다.

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고 미국의 지원으로 패색이 짙어진 중동 국가들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기름값을 무려 네배나 올려 선진국 경제를 초토화시켰다. 73년 말 3달러였던 유가는 다음해 초 12달러에 육박했다. 78년 2차 오일 쇼크까지 터지자 지구촌의 돈은 중동으로 쏠려 들어갔다.

이 영화는 이같은 70년대 미국인들의 공포심을 반영하고 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대통령의 음모'(76년)로 미국 사회 비판에 앞장섰던 파큘라 감독은 5년 후 오일달러로 눈을 돌려 금융계의 비리를 파헤쳤다.

영화는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제인 폰다와 팝 가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을 전면에 내세웠고 살인.음모.섹스라는 대중적 요소를 추가했다. 그럼에도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금융계의 난해한 용어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아랍에 대한 미국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아프가니스탄 재건이 거론되면서 석유 메이저들이 카스피해 지역의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요즘이다. 선진국들은 지구촌 마지막 유전지대로 불리는 이곳을 개발함으로써 중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70년대 오일쇼크의 악몽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본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imi@joongang.co.kr>

***화려한 음모

원제=Rollover(1981년)

감독=알란 J.파큘라

주연=제인 폰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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