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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한당 총재 윤보선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정계는 휴가가 없는 곳이지만, 올해는 참으로 다단한 한해였어….』 비준 파동 직후 국회를 떠나 60여 차례 지방 유세로 한해를 보낸 신한당 총재 윤보선씨는 병오년 소감을 「다단」이란말로 서두를 꺼냈다. 『민중당에 건 희망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민중당에서 뛰어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고, 빈손으로 나와 빈손으로 선명 야당을 만들자니, 나로서는 큰 고난이었어…. 무거운 정신적 부담을 느꼈지….』
지난해 여름, 야당가에 휘몰아친 한·일 협정 비준 저지의 열풍은 통합 민중당을 강경·온건 두 갈래로 찢어놓았고, 치열했던 강·오 대결은 온건파의 원내 복귀로 마침내 몌별-윤씨에겐 원외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이다.
『한·일 협정 비준 반대란 점에서는 두 파의 견해는 똑 같았지…. 다만 그들 (온건파)이 끝에 가서 배신하고 공화당 노선을 따라 한·일 협정을 통과시켜 줌으로써 국가에 큰 해를 입혔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동지를 해치는 사람으로 단정한 거야.』
강경파의 총수 윤보선씨는 김도연 서민호 정일형 정성태 정해영 김재광씨 등 사퇴 의원들과 신당 운동에 착수, 지난 3월말 신한당을 창당하기까진 5개월여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이 집에서 들끓었지. 안사랑 바깥 사랑채마다 당 동지들이 무여 정세를 검토하고 대책을 협의하는 회합이 매일처럼 열렸는데 그 많은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은 힘든 일이었어.』 안국동 8번지 윤보선씨 댁은 신한당 창당의 산실-줄이어 찾아드는 당 간부들과의 잦은 회합은 가족들과 보낼 시간을 빼앗았다.
『글쎄, 아이들 얼굴 한번 못보고 하루를 지날 때가 많았을 정도지. 요즘? 마찬가지야….』
『우리 당은 그동안 여러 차례 유세를 했지…아마 기록적일걸-. 이것은 국민들에게 신한당을 알려주고 신한당이 왜 생겼나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 내가 당수가 못되어서 당을 깨고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당을 만들었다는 모함을 하지만 절대로 그게 아냐.』
『유세 때문에 지방에 가 있는 동안 국민들의 호흡을 더 가까이 느끼는 기분을 맛보지…. 아마 주문진에서의 일이었을 거야. 시장에 나가 어떤 상인과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이 내 손을 잡은 채 목이 메어 말을 못하더군. 나는 그 사람의 눈빛에서 정치인의 책임을 더욱 강하게 느꼈어.』
「야당다운 야당」이란 목표를 내세워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극한론만을 펴는 것은 정치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요… 그런 강경론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우리 나라에선 아직 한번도 국민의 뜻으로 정권을 교체한 경험이 없지 않아? 따라서 여당은 국민 의사의 결단에 의해 집권했다고 볼 수가 없어. 더우기 대한민국의 여당은 국가의 이익은 내버린 채 정권 연장과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다만 합헌적 정권 교체로 물러나게 하는 길 밖에 없어. 여·야의 차이가 목적이 같고 방법이 다른데 있다면 타협이 있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지금 타협은 없는 거야. 여기에 야당다운 야당의 의의와 극한론의 근거가 있는 거야.』
-「월남전은 청부 전쟁」이라는 발언이 입건되었을 때의 소감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앞으로도 내 생각에 올바른 것은 말할 작정이야. 그건 국민의 가슴속에 가득 찼으나 말하지 못하는 지금 실정에 있어 하나의 배출구가 되는거 아냐.』
당을 만들고 유세를 나가는 등 바쁜 시간을 빼놓고는 자기 집 울밖을 나서지 않는 것이 윤보선씨의 생활이다.
정원을 거닐고 잔디를 손질하며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부인과 같이 교회에 나간다.
올해 7순의 윤보선씨는 지난 한해를 자기 신념을 실천하는데 보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그의 이런 신념은 한·일 협정 후에 나타난 사태들, 월남 파병의 결과 등으로 더욱 굳어졌다.
그것은 내년 총선에서의 「신화적 정권 교체」란 목표를 향해 불타고 있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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