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예술가 급탄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4호 30면

혹시 예술이 탄생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2년 전쯤 작가 김영하가 TEDxSeoul에서 강연한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이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 그 영상이 TED.com에 소개되어 다시 보았어요. 2년 전 그때도 감명 깊었습니다만 이번에 다시 보니 감동이 소름처럼 돋았습니다. 그 사이 저는 예술이 탄생하는 광경을 제 눈으로 보고 제 몸으로 겪었으니까요.

김영하의 강연 내용을 소개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로 태어난다. 낙서, 노래, 춤, 소꿉장난, 놀이처럼 아이가 종일 지칠 줄 모르고 하는 모든 행위가 곧 예술이다.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이런 원초적인 예술 체험에 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라면서 점점 예술과 멀어진다. 예술가가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악마들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 선생, 친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그거 해서 뭐 하려고?”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린 예술가를 깨우자. 지금 당장.

저도 당장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역시 제 주위에는 악마가 많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로, 책값을 구하는 아들의 얼굴로, 퇴근하지 않는 상사의 얼굴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얼굴로 다가왔어요. 저를 위하고, 저를 걱정하고,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 악마들 덕분에 저는 예술가가 되지 못했어요.

얼마 전 저는 어느 마케팅 콘퍼런스에 참석했습니다. 지루했습니다. 용어는 어려웠지만 새로운 내용은 없었어요. 저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다른 참석자들 역시 하품하고 진저리를 치며 저처럼 지루해 하더군요. 그 순간, 저는 보았습니다. 그들 속에 잠들어 있던 어린 예술가가 거인처럼 깨어나는 것을.

제 옆에 앉은 남성은 노트에 필기하는 척했지만 실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흐의 차이와 반복이라도 연주하는 것 같은 선들. 얼핏 보면 낙서 같지만 그것은 그의 마음을 미세한 차이의 반복으로 표현한 미술이란 걸 전 알 수 있었어요.

대각선으로 앉은 여성은 휴지를 잘게 뜯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지요. 아주 작고 느린 움직임이라 하마터면 저도 놓칠 뻔했어요. 찢기만 했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을지 모르죠. 단순한 행위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찢은 휴지를 말기 시작할 때 그 여성은 창조적 긴장, 예술적 흥분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는 그것을 공처럼 동그랗게 말기도 하고 뱀처럼 길게 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았어요. 혼자 무어라고 계속 중얼거렸으니까요. 몰입의 경지. 놀라운 순간이었죠.

그래도 제게 일어난 변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춤을 제법 잘 추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핀잔을 듣고 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기 전에는 말이죠. 그 후로 저는 바위 역할만 했어요. 그 돌이 깨어졌어요. 바위에 갇힌 손오공이 뛰쳐나오듯 리듬이 몸 밖으로 마구 뛰쳐나오는 거예요. 다리를 얼마나 심하게 떨었는지 행사 스태프 여성이 달려와 제 다리를 붙잡을 정도였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들 마음속 어린 예술가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심심함과 지루함이란 사실을.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