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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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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이용자 일부가 비데 시트 커버를 덮거나 뒤로 기대어 잠을 청하는 자리로 활용, 파손되는 사례가 빈번하여 관리에 어려움이 따릅니다. 목적에 맞게 사용 바랍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본사 화장실에 붙어 있는 안내문이다. 십중팔구, 눈에 띄는 곳에선 잠깐 졸기도 힘든 신참 직원이었을 게다. 착잡한 건, 화장실에 이런 방을 붙인 기업의 일처리다. 이 기업의 덩치로 보면 하급 직원용 휴게실 하나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근본적으론 일만 제대로 한다면 잠깐 눈을 붙이든, 출퇴근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든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근태관리’라는 산업화 시대의 습관은 떨치기 어렵고, 화장실에 계도문을 붙이는 건 손쉬울 뿐이다.

 화장실 계도문이 떠오른 건 엊그제 금융감독원이 재형저축 과잉 판매에 대한 단속을 한다는 얘길 듣고서다. 재형저축은 말 그대로 신참 근로자의 재산 형성을 돕는 저축이다. 18년 만에 부활했다. 과거에는 금리가 연 10% 이상이었다. 그러나 새 재형저축은 각종 우대를 받아도 금리가 연 4.6%가 될까 말까다. 이마저도 3년이 지나면 하향 조정 가능성이 있다. 총급여 5000만원 이하, 7년은 부어야 비과세 등 조건도 까다롭다. 그러나 일주일 만에 재형저축은 70만 계좌 이상 팔렸다. ‘너무 많다’고 판단한 금감원은 결국 ‘적당히 하라’는 방을 내걸었다.

 복기를 해보자. 재형저축 부활이 공식화한 건 지난해 7월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다. 정부는 이를 서민금융 지원책이라고 했다. 올해의 대표 정책으로도 내세웠다. 홍보는 이렇게 정부가 먼저 시작했다. 그런데 열풍이 부니까 금감원은 재형저축을 ‘유의해서 가입해야 할 상품’이라며 자료를 돌렸다. 과당 경쟁을 탓하지만, 재형저축 판매가 시작된 다음날 은행별 실적을 집계해 비교·공개한 것도 금감원이다. 은행이 직원을 아무리 닦달해도 단기간에 이런 판매량을 만들 순 없다. 열풍의 근원은 적금 금리가 연 3% 안팎인 저금리 상황에서 이만한 상품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어딜 가도 마음 편히 졸 곳이 없다면 화장실이라고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방부터 붙일 일이 아니다. 재형저축에 들어도 이득을 보는 건 연간 15만원 안팎인데 ‘재산 형성’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고단함부터 살펴야 한다. 금융사가 창조적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길은 막혀 있고, 정부가 방침을 세워야만 너도나도 같은 상품을 내놓게 되는 후진적 재테크 시장 구조도 고쳐야 한다. 근치가 안 되면 병은 재발하기 마련이다.

 하기야 이 정도면 양반이긴 하다. 지하철 사당역 3번 출구는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출구다. 불편해도 통행량을 꽤 소화했던 계단을 돈을 들여 한 줄씩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로 바꿨다. 그 후 3번 출구에는 이런 현수막이 붙었다. ‘고객님! 2번 출구를 이용하시죠! 지하철을 빨리 타실 수 있습니다.’

김 영 훈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