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백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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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혜순(1955~) '백마' 부분

갑자기 내 방안에 희디흰 말 한 마리 들어오면 어쩌나 말이 방안을 꽉 채워 들어앉으면 어쩌나 말이 그 큰 눈동자 안에 나를 집어넣고 꺼내놓지 않으면 어쩌나 백마 안으로 환한 기차가 한 대 들어오고 기차에서 어두운 사람들이 내린다 해가 지고 어스름 폐가의 문이 열리면서 찢어진 블라우스를 움켜쥐고

시(작품)는 문법이라는 말의 제도 속에 갇혀 있는 것이지만, 그 말의 감옥에 시인이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시는 때로 알 수 없는 내면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신비스럽게 솟아오른다. 마치 진흙탕물 위의 연꽃처럼.

'백마'는 김혜순 시의 백미(白眉) 중의 하나로 꼽힌다. 무시무시한 공포를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형상화하면서도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읽히는 시를 만나는 일은 드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들의 꿈이다.

최승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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