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것 속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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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저녁 늦게 문총회관 앞에 나서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이 요즘 내 사정이다. 그런데 언제 흰눈을 뒤집어쓰고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의 가로수 잎이 몇 장 그래도 어둠과 식별할 수 있는 황혼,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곳을 응시한다.
내 눈앞에는 그 모양이며 크기며 똑같은 쌍둥이 건물이 서있는 것이다. 그 두 건물(서울시민에게는 굳이 건물 명을 밝히지 않아도 좋으리라)은 아래층에서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방마다 불을 켜고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조명구의 위치까지 같을 까?
그러나 나의 응시는 똑같은 건물, 똑같은 내부시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도 똑같은 두 건물의 차이점에 있는 것이다. 똑같은 위치의 똑같은 조명기구에 붙은 형광등의 불빛이 볼수록 확연한 색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건물의 것은 희디희고, 다른 한편의 것은 누르스름한 것이다.
아니다. 색상의 차이가 아니다. 조명도의 차이일 것이다. 한편은 맑고 밝은 대신, 한편은 무엇을 한 꺼풀 씌운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게 틀림없다. 밝은 형광등의 건물이 「유솜」이고, 다른 편이 경제기획원이리라. 나의 이 관찰은 선입관이 개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지로 가보기를 권하고 자리를 떠야 하겠다. 짙어져 가는 어둠 속에서 무한정 멍청이처럼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나의 형광등이 아니라 창마다의 형광등의 집단이기 때문에 뚜렷한 불빛의 차이를 주는 것일까?
조국근대화- 이 당연한 지상 앞에서 우리는 가끔 응시하는 자세를 가져야할는지 모른다. 하나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결함이라도 모이면 그것은 이미 어떤 결정적인 의미를 발휘하는 것은 형광등에 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도며 「매머드·빌딩」이 다 필요하다. 하나 당장 눈에 띄지 아니하는 곳에의 배려는 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을 말해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시간이 지나면 「매머드·빌딩」처럼 자리를 차지한다. 【곽복록<서강대학교수·독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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