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생각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대중문화 전성시대다. 2004년 ‘실미도’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이래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베를린’까지 계속되고 있다. 1000만이란 숫자는 우리나라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은 봤다는 얘기다. 하긴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극장에 가서 그것들 중 세 개나 봤으니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영화 참 잘 만든다. 기법도 발달했고, 메시지도 있다.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정치적·사회적 내용도 담고, 내면적인 정서도 적절히 자극한다. 이러니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는다.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인 칸·베니스·베를린에서 수상한 작품들만 해도 ‘취화선’ ‘올드 보이’ ‘피에타’까지 손으로 꼽을 수도 없다. 가히 문화적 한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게 한다.

 한류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K-팝이다. 1990년대 드라마에서 시작해 아시아에 퍼진 한류 열풍. 2000년대엔 장한 우리 젊은 소년·소녀 그룹들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남미·중동에까지 퍼져 나가게 했다. 지금은 그 정점을 싸이가 찍고 있다. 전 세계의 화제가 된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13억8900만 건 조회되고, 벌어들인 금액으로 800만 달러(85억원)나 된다고 한다.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펼친 싸이 공연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 한류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생각하면 왠지 불안하다. 전에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를 만난 적이 있어 이런 마음을 전했던 기억이 있다. 그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미국과 영국의 예를 들었다. 1950~60년대 미국에선 프런티어 정신을 앞세우고 로큰롤·팝·컨트리 음악을 퍼뜨린 적이 있었단다. 그 중심 역할을 엘비스 프레슬리가 했고, 영국에선 비틀스가 했다 한다.

 유럽의 고급문화에 대해 항상 열등감을 갖고 있던 미국이 대중문화로 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미술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정치·경제 중심지가 된 미국 뉴욕이 화가 잭슨 폴록이나 팝아트 등을 내세우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런 것들의 이면에는 프런티어 정신으로 뭉친 미국 각계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이 사그라져 가던 1960년대 리버풀에서 탄생한 비틀스도 마찬가지다. 산업 발전이 멈춘 절망의 도시에서 젊은이들의 가슴에 자신감과 열정을 심어주고, 대중문화 중심지인 뉴욕으로 진출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이들에게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했다. 여기도 역시 제국주의를 이뤘던 영국의 프런티어 정신이 있었다고 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프런티어 정신이 어디 그들만의 것일까. 만들어서 포장하고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지. 우리도 이젠 생각해야 한다. 한류가 일시적인 흐름으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수원지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루는 내용들을 찾고, 다양한 흐름이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방법은 있다. 학자들과 순수·대중예술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국적 사상과 정서와 예술 형식에 관해 논의하고 만드는 거다. 한(恨), 정(情), 집단적 율동, 섹시함 이런 것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건도 갖춰졌다. 문화부 차관 출신이 장관과 교육문화수석에 임명됐다. 정치인과 달리 이분들은 업무 파악이 이미 끝났을 터. 퇴직하는 후배 관리들 자리 챙겨주기에 골몰하지 말고, 큰일을 해 보면 어떨까. 10년, 20년 후에도 이어질 큰 그림이 될 정신적 기둥을 만들어 보자. 문화예산도 2% 달성한다니 이걸 시작으로 만든 ‘문화가 있는 삶’ 꼭 한번 누려 보고 싶다.

박 일 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