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에 걸친 철학사를 동원해 밝히는 10여 분간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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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독서 방식은 한 책을 읽으면서 다른 책과 겹쳐 읽는 일이다. 어떤 책에 나오는 의문점을 찾아 또 다른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독서가의 반열에 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제일 먼저 읽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대학 신입생 필독도서 목록에 입문서가 흔히 포함되는 것은 입문서가 특정한 학문 전반에 걸쳐 안내한다는 점 외에도 수많은 관련도서를 줄줄이 매단 입문서는 그 자체가 다른 책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입문서가 지루하다면 대중을 겨냥해서 씌어진 논픽션을 읽을 수 있다. 한국에는 정교한 논픽션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외국에는 광범위한 취재를 거쳐 씌어지는 논픽션이 흔하다.

20세기 초 빈 유대 공동체에서 비롯된 씨앗
이번에 출간된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의 『비트겐슈타인은 왜?』(김태환 옮김, 웅진닷컴)는 취재형 논픽션 류의 대표적인 책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지녔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언어철학이 그 한 줄기를 차지한다면, 칼 포퍼의 생애와 정치철학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지난 세기 초 빈 지식인 공동체와 논리실증주의와 홀로코스트라는 점에서 한 번 만난다. 그리고 1946년 10월 25일 버트란트 러셀을 정점으로 이 둘은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다시 한 번 더 만난다.

BBC의 다큐멘터리 전문작가 겸 프로듀서인 에드먼즈와 에이디노는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의 생애와 학문을 다루기 위한 시점으로 앞에서 말한 1946년 10월 25일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일어난 10여 분간을 선택한다. 흔히 ‘부지깽이 스캔들’이 일어난 이 순간이 실은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애에서는 무의미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철학적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이 순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비록 300면이 넘는 분량이지만, 이 책의 질문은 간단하다. 바로 그 날, 초청강연자인 칼 포퍼와 행사를 주최한 모임의 의장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근본적 성격에 관해 격렬하게 논쟁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여 분이 지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부지깽이를 든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10여 분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나 책을 조금 읽어가다 보면, 글쓴이들이 애써서 찾아낸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증언은 이해 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칼 포퍼는 자서전 『끝나지 않은 탐색』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궁지에 몰리자 격분해 부지깽이를 내동댕이치고 문을 쾅 닫으며 방을 나갔다고 회상했는데, 당시 그 방에 함께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지지자들은 포퍼의 이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때문에 글쓴이들은 이처럼 두꺼운 분량의 책을 쓰게 됐다. 참석자는 물론 당사자의 증언마저도 믿지 못할 형편이라면 말 그대로 논리실증주의적인 방식으로 알 수 있는 사실부터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다행히도 에드먼즈와 에이디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런 일에 익숙했다. 덕분에 이 책은 당사자들인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는 물론 제3의 인물 버드란트 러셀, 빈의 논리실증주의 학파 등의 사상 전반에 걸쳐 다시 되짚어보게 됐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터뷰와 관련 문헌 검색을 통해 검증을 거쳐나가는 것은 기본이다.

본격 저술로 독자를 인도하는 흥미진진한 에피타이저
10여 분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9세기 빈까지 거슬러 올라간 이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비트겐슈타인은 왜?』가 결코 철학 입문서나 평전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전적으로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다. 현대 철학에 입맛을 잃은 독자를 다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에게로 이끌 수 있는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 몽크의 평전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전2권, 남기창 옮김, 문화과학)을 비롯한 수많은 비트겐슈타인 평전과 『논리 철학 논고』(이영철 옮김, 천지), 『철학적 탐구』(이영철 옮김, 서광사),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박정일 옮김, 서광사) 등을 비롯한 비트겐슈타인 원전을, 또 『열린 사회와 그 적들』(전2권, 이한구 옮김, 민음사), 『추측과 논박』(전2권, 이한구 옮김, 민음사) 등 칼 포퍼의 원전을 읽을 수 있겠다. (김연수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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