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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여명|이조 중엽-말엽 인물중십|유홍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약백년전의 인물|정확한생애 몰라
김정호는 한평생을 초야에 묻혀살면서 나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않고 오직 자기의 힘으로 거의 오늘날의 현대적 지도에 비길만큼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의 지도와 지지(지리예)를 만들어낸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백여년전에 돌아간분이지만, 어떻게된 까닭인지 그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는 겨우 몇줄의 간접적인 기록과 야간의 구전(전설)이 전해질 따름이고, 그후손 또한 전혀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그의 생몰년대마저도 정확히 알수없다.
구전에 의하면 그의 본관은 당(오) 산(청도)이고 자를 백원(또는 백온), 호를 고산자라 하였다. (이름은 정위라고도 썼음)

<황해도 태생으로|국내각지를 답사>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옮기어 만리재(만리현·현서대문구봉래동) 에서 살았고 (혹은 공덕리·현마포구공덕동에서 살았다함) 광주리장수의 남편이었으며(일설에는 군교=하급장교=집사람이었다고도함) 두남매를 두었다한다. (또는 딸 하나밖에 없었다 함) 변변치못한 집안에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 있었는데도 일찍부터 지도제작에 뜻을 두어 국내 각처를 두루 찾아다니며 널리 조사하여 심지어 백두산꼭대기에 올라가기만도 일곱번 혹은 열세번이나 한끝에 드디어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이를 간행키위해 그딸의 혼기를 놓쳐가면서까지 부녀두사람의 힘으로 판각·인행하여 고종초년에 정권을 쥐고있던 대원군에게 바쳤던바 도리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는 문서를 함부로 만들었다는 죄에 몰리어 옥에 갇히어 모진 매를 맞은 나머지 목숨을 잃었을뿐더러 대동여지도의 판각은 물론 인본까지도 압수되어 불살라버렸다한다.

<인본수난은 없어|근거약한 옥사설>
그러나 이상과같은 구전중 그가 백두산을 여러번 오르내렸다든지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판각이 소각되고 자신이 옥사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의 불편하던 교포기관이나 고산자의 어려운 생활정도로 미루어 백두산을 수차례나 오르내리도록 전국을 두루 살피지는 못하였을 것이며 또 오늘날 대동여지도의 인본및 전사본이 아무런 수난을 겪은 흔적없이 여러곳에 전해오는 사실로써 그의 옥사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오직 그를 아끼고 동정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구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유재건의 기록에|대동지지 편집설>
고산자에 관한 기록은 우선 유재건(겸산)이 이향견문녹 (권8)에서 『김정호 (자호고산자)는 본래 기교한 재예가 있고 특히 지리학에 열중하였다. 널리 상고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손수 판각하여 간포하였는데 그 상세·정밀함은 고금에 견줄바 없고 이외 동국여지고 (대동지지)를 편집하였다』라는 내용을 전하고, 당시 학식이 높았던 혜강 최한기 (1803∼1879) 가 1834년 (순조시) 에 김정호가 지은 청구도에 제(서)를 썼는데 그중에서 『나의 친우 정호는 소년때부터 깊이 지지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섭렵하였다.』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어 마냥 한가한 때면 사색하여 간편한 집람식을 발견하고 방안 (일종의 경위선표)을 획성하여 정연한 청구도를 완성하였다』고 함이 적혀있고, 다시 같은 시대의 석학이던 오주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 (권38)중에 『최한기는 서울 남촌 창동에 살아있는데 순조34년에 중국장정빙의 지구도를 판각하였다.
이때 이를 맡아 새긴 사람이 김정호였다』 라고함이 전한다.

<이조고종 원년에|대동오지도 완성>
이밖에는 그자신이 제술한 청구도, 대동지지, 대동여지도에 그자신이 남겨둔 학문적인 관계문자뿐인 것이다.
이상과같은 구전과 기록을 묶어 미루어볼때 그는 본시 불우한 계급에 태어나서 출세도 못하고 평생 빈핍과 고로를 면치못하였고 그자손 또한 몹시 영낙하였음이 사실인것같다.
다만 그가 최한기와 막역한 친우였고 또 대동여지도의 재간과 대동지지의 완성이 모두 고종원년 (1864년)에 이루어진 점으로 보아 그는 순조·헌종·철종·고종초의 4대에 걸쳐 생존하였고 그의 나이 또한 60세정도이었는듯하다. <필자=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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