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덩어리 포탄" 중학생 불장난, 포항 불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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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0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 우미골 마을. 골목에 들어서자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상당수 주택의 슬레이트 지붕은 폭격을 맞은 듯 주저앉았고 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집 안엔 타다 만 쓰레기 더미와 옷가지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들은 전날 화마(火魔)의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주민 최영익(37)씨는 “불덩이가 집을 덮치는 순간 맨발로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건졌다”며 “한평생 벌어 산 집인데 이제 무일푼 신세가 됐다”고 가슴을 쳤다. 최씨는 혹시 타다 남은 가재도구라도 있을까 찾아 봤으나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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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에 불덩이가 날아든 것은 전날 오후 3시38분부터. 우미골에서 500m 떨어진 용흥초 뒷산인 탑산에서 발화했다. 중학생이 불장난을 친다며 라이터로 낙엽을 태운 게 원인이었다.

 ‘쉬이익’ 하는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불덩이가 마을로 쏟아졌다. 솔방울과 썩은 나뭇가지에 옮겨 붙은 불은 성인 주먹만 한 크기의 불덩이로 변해 마을을 덮쳤다. 불덩이는 초속 10m의 강풍을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화마에 휩싸이는 지역이 확 불어났다. 용흥동 주택가를 낀 탑산에서 인근 수도산·학산 등 반경 4㎞ 거리에 있는 도심 3개의 산을 한 시간여 만에 집어삼켰다.

불덩이는 산과 산 사이 400m 도로를 건너뛰어 옮겨다니며 피해를 냈다. 이재욱 포항 북부소방서장은 “날아다니는 수십 개의 불덩어리는 포탄 같았다”고 말했다. 이날 52만 포항시민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마을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긴급 대피한 용흥동 150가구 200여 명의 주민은 숨 넘어가듯 쓰러져 기침을 토해냈다. 조명제(51·여)씨는 “불붙은 대문을 헤집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불은 순식간에 이 마을 28가구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불덩이는 아파트 단지에도 몰려왔다. 우현동 대동우방아파트 20층 두 가구도 시커멓게 그을렸다. 아파트 주민 김민수(34)씨는 “베란다 문을 열어둔 꼭대기 층에 불덩어리가 거실로 날아들어 화를 입었다”고 말했다.

 포항시는 이날 오후 8시쯤 불길을 잡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오후 10시쯤 불길이 다시 주택가로 몰려왔다. 완전 진화되지 않은 불이 강한 바람에 되살아난 것이다. 이 바람에 낮에 긴급 대피했다 집으로 돌아온 1500여 명의 주민은 다시 집을 뛰쳐나가야 했다. 주민 이기태(60·북구 용흥동)씨는 “포항시의 말만 믿고 하루에 두 번 대피했다”며 “한밤중에 주민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등 아비규환이었다”고 말했다. 불은 임야 5만㎡를 태운 뒤 17시간 만인 10일 오전 8시30분 완전 진화됐다.

 이날 불로 거동이 불편한 한 70대 노인이 방안에서 불에 타 숨졌다. 주민 14명은 화상을 입거나 연기를 마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불은 포항 북구 지역 주택 56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화마로 집을 잃은 이재민 118명은 마을회관 등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다.

 경찰은 마을 뒷산에서 불장난을 한 중학생 이모(12)군을 방화 혐의로 붙잡아 조사 중이다. 이군은 이날 오후 3시32분쯤 용흥초 뒷산에 친구 2명과 함께 올라 라이터로 낙엽을 태웠다. 이군은 불이 나자 119에 신고한 뒤 도망간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군이 형법상 처벌할 수 없는 미성년자(만 14세 미만)임을 감안해 소년부에 송치할 예정이다.

김윤호·차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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