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온 큰손 노신사, 금 100억어치 사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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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해외 큰손들은 금 비중을 줄이는데 국내에선 금 매입 열풍이 불고 있다. 얼마 전 신한은행 프라이빗뱅킹(PB, 거액자산가 자산관리 서비스)센터 직원들은 하루 종일 골드바(Gold Bar)를 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한 노신사가 찾아와 100억원어치를 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재산을 금으로 바꿔 세상을 떠날 때 자녀에게 세금 부담 없이 상속하겠다”며 골드바를 사갔다. 양수경 신한은행 서울 이촌동 PB센터 팀장은 “골드바를 찾는 수요가 점점 늘어 최근에는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며 “물량이 부족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을 기다려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수퍼리치(Super Rich,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자산가)의 골드바 수요가 급증하면서 지난해 금융권에서만 총 1500억원어치 이상의 골드바가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신한은행의 경우 2월 현재 월 평균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배 정도로 늘었다. 귀금속 유통업체인 한국금거래소의 판매 실적 자료를 보면 지난해 1월 4억원에 그쳤던 이 업체의 골드바 판매량은 12월 25억원으로 5배 이상 늘었다. 한국은행도 2월에만 20t(10억3000만 달러)을 사들였다. 2010년 말 14.4t이던 한은의 금 보유량은 지난달 104.4t으로 늘었다.

 이런 상황은 금 비중을 줄이고 있는 해외 큰손들의 전략과 사뭇 다르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금지수연동형펀드(ETF)가 올해 팔아 치운 금은 약 140t에 이른다. 이에 따라 국제 금값은 2012년 11월 말 대비 10%나 빠졌다. 국내 금값도 8일 현재 g당 5만5140원으로 2011년 8월 이후 1년6개월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 때아닌 금 매입 열풍의 일차 원인은 저가매수 심리다. “ 안전자산인 금을 쌀 때 사놓자”는 것이다. 한은의 외환보유액 중 금 비중은 1.5%밖에 안 된다. 대만(5.6%), 태국(4.5%)보다 적다. 수퍼리치들도 골드바 값이 많이 내린 지금이 구입 적기라고 본다. 1㎏짜리 골드바 가격은 개당 6370만원으로 7000만원 이상이던 1년 전보다 10% 이상 내려갔다.

 또 다른 이유는 절세다. 증여·상속세를 안 내고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금을 주목한다는 것이다. 금은 예금·부동산과 달리 증여나 상속 여부를 세무 당국에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 팔 때도 매매차익에 대해 세금을 물지 않는다. 양수경 팀장은 “올 들어 세법시행령이 개정되면서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연 2000만원 이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예금을 해지해 골드바를 사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수요가 점점 커지자 국민은행도 골드바 판매 대열에 가세했다. 4일 판매를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총 114개, 12억6000억원어치를 팔았다. 골드뱅킹을 통해 금에 투자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골드뱅킹은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 금에 투자한 뒤 금 시세가 오르면 수익을 내는 상품이다. 소액으로 적립식 투자가 가능하고, 해지할 때는 골드바나 현금 중 선택해 받을 수 있다. 신한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 말 골드뱅킹 잔액은 5063억원으로 2011년 말(4176억원)보다 20% 이상 늘었다.

이태경·채승기 기자

◆ 골드바(Gold Bar)

순도 99.99%의 막대 모양 금괴다. 1㎏짜리 골드바는 가로 5㎝, 세로 11㎝, 두께 0.8㎝로 딱 최신 스마트폰 크기다. 100g짜리는 명함 3분의 2 크기로 부가세·수수료를 합치면 640만원이다. 10g짜리는 초콜릿 한 조각 크기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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