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운 그곳 ‘7번방의 선물’ 홍제동 개미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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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7번방의 기적’에서 용구와 예승이가 오순도순 살던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

1000만 관객을 울린 영화 ‘7번방의 선물’은 여섯 살 지능을 가진 사내 용구(류승룡)가 지독한 누명을 쓰는 얘기다. 교도소에 가기 전 용구가 초등학생 딸 예승이(갈소원)와 오순도순 살던 산동네가 바로 서울 서대문구 홍제 3동의 개미마을이다. 영화에는 아주 잠시 등장했지만, 부녀의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가 잊지 못할 만큼 행복해 보였다.

새벽부터 눈이 내린 날 개미마을에 갔다. 인왕산(388m) 자락에 비탈지게 놓인 산동네다. 가난한 사람들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며 산대서 개미마을이다. 그렇게 불린 지가 20년째다.

지하철 3호선 홍제역을 나와 7번 마을버스에 올랐다. 시장통을 지나 10여 분쯤 갔을까, 담벼락마다 소담한 꽃 그림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2008년 개미마을이 ‘뜬’ 게 이 벽화 덕이었다. 금호건설과 서대문구가 주도해 5개 대학 미술학도들이 붓을 들었다. 하늘·달·나무·꽃…. 족히 40년은 넘은 낡은 집들이 고스란히 캔버스가 됐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새 칠이 많이 벗겨진 벽화는 외려 아련한 맛이 있었다. ‘진짜 용구가 살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눈에 익은 정거장이 나왔다. ‘삼거리 약수터·연탄가게’, 영화에서 예승이가 오지 않는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버스 정류장이 여기였다.

삼거리에 내려서자 영화 속 장면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40년 전 연탄가게였다는 정류장 앞 수퍼에선 주인 할머니가 아침볕에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수퍼 맞은편으로 약수터를 향해 난 좁은 오르막엔 진분홍색 용구네 집이 비뚜름하게 박혀 있었다. 예승이가 용구의 신발 끈을 야무지게 매주던 병아리색 울타리도 영화와 꼭 같았다. 집 안 장면을 찍은 건 수퍼 옆 길가에 선 하얀 집이었다. 연로한 어르신이 사는 집이라고 했다.

산비탈을 올라 마을버스 종점(개미마을 정류장)에 이르자 마을이 죄 내려다 보였다. 영화에서 용구네 집 사글세가 7만원이랬나. 벽화가 아니었다면 영화 배경인 15년 전이 아니라 40년 전 풍경이라 해도 믿을 만큼 낡고 낮은 집들이 산기슭에 다닥다닥 묻혀 있었다. 주민의 태반이 노인이요, 아직 도시가스를 못 들여 집집이 연탄재가 뽀얬다. “한국전쟁 후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천막 짓고 살던 ‘인디언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어요. 개발 찬반이 심해서 담벼락마다 험담이 가득했는데 그걸 덮어줬으니 벽화가 더없이 고맙지요.” 홍제3동 양판수(60) 통장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떨렸다.

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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