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하루살이의 하루는 사람의 평생과 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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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진형준
홍익대 불문과 교수

졸업을 앞둔 학생이 내 방에 찾아왔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미안한 마음을 학생에게 전한다. “취업이 어려워서 고생이 많지?” 그런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취직하려면 얼마든지 돼요.”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다. “홍대 불문과를 다녔다는 게 참 묘해요. 엘리트 소리를 죽 들으며 살아왔는데 그게 끊길 기로에 있거든요. 대기업에 취직해 계속 엘리트의 길을 가기에는 좀 아슬아슬하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아깝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왜 대기업에 그렇게 목을 매는데.” 이 친구 아주 솔직하게 대답한다. “연봉도 연봉이지만 대기업에 가야 장가도 잘 갈 수 있거든요.” 말하자면 간판을 그럴듯하게 달기 위해서 대기업에 목을 맨다는 소리다.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후 학생들에게 해주는 이야기에 레퍼토리를 하나 덧붙였다. 이전까지는 주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회에 나간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소모품밖에 더 되겠느냐.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았다 하더라도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해 금세 써먹을 수 없는 낡은 게 돼버린단다. 그보다는 어떤 변화에도 대처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추는 게 중요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변화하면서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

 또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세상이 조금은 변하고 있단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좀 유보해야 한다고들 해왔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더 중요한 세상이 돼 간다는 이야기. 예전에는 어디 인간성이 밥 먹여주나,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이제는 사람답게 사는 게 밥도 먹여주는 그런 세상이 조금은 돼 간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학생과의 면담 이후 나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졸업을 앞둔 학생의 나이는 기껏해야 20대 중후반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너, 몇 살까지 살 것 같니?” 당연히 100세는 넘길 것 같다는 답이 돌아온다. “너, 그렇다면 이제 겨우 인생의 1/5이나 1/6 정도 살았을 뿐이지 않니? 그런데 지금 모든 게 다 결정날 듯이 조급하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니? 벌써 그리 늙었니?”

 그렇다. 문제는 조급증이다. 세상이 복잡해지는데 사람들의 생각은 더 단순해지듯이 수명이 늘어나는데 어릴 때, 그것도 그때 단 간판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결정난다는 듯이 더 조급해진다. 찬찬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금 평균수명 80세 시대를 살고 있다. 별 탈만 없다면 지금도 100세 넘도록 사는 것이 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이나 제도는 여전히 평균수명 60세일 때에 머물러 있다. 평균수명이 80세가 되고 90세가 된다는 것은 60세 넘은 노인, 먹여살려야 할 노인이 늘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균수명 90세 때의 90세는 평균수명 60세 때의 60세와 같다고 보면 된다. 그게 바로 상대적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공자님이 말씀하신 이순(耳順)의 나이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삶의 시간은 물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살이는 겨우 하루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루로 평생을 산다. 모든 삶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질(質)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평균수명이 늘어난다고 노인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출생률의 변화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비율에 약간의 변동은 있었을지 몰라도 언제고 그만큼 존재해 왔다.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었거나 본 적이 있다. 60세 정년 제도가 생긴 것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때란다. 그때 평균수명이 61세였단다. 그러니까 죽기 전 1년 정도는 푹 쉬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배려에서 생긴 것이 정년 제도란다.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평균수명 80세 시대인 지금 65세에 이른 사람이 지공(지하철 공짜)도사 대접을 받기에는 너무 젊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바란다. 제발 노령화 사회, 노인 대책이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기를. 그래야 발상도 바뀌고 대책도 제대로 나온다.

진 형 준 홍익대 불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