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물은 나의 화두(話頭)"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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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인터넷 등 영화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이 급변 중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여전히 막강한 자본과 배급력으로 세계 시장을 틀어쥐고 영화의 종(種) 다양성에 장애가 되고 있다. 특수효과와 스펙터클, 단순한 이야기 구조 등 천편일률적으로 영화를 앙상하게 만들고 있는 것.

이런 추세를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과 세계관을 영화 속에 담고자 하는 이들이 각국에서 분투하고 있다. 이들이 가진 영화관(觀) 과 비전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는 연재물을 마련했다.

4년전 베를린 영화제 때 일이다. 경쟁부문에 출품된 '오픈 유어 아이즈'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 지금은 톰 크루즈의 애인으로 화제를 뿌리고 다니는 페넬로페 크루즈가 주연한 이 영화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곱씹게 하는 독특한 아이디어만으로도 새로운 감독의 출현을 알릴 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엔딩 타이틀이 오르자 객석을 메운 젊은 관객들은 박수와 휘파람,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열띤 반응에 도취한 듯 페넬로페와 함께 껑충껑충 뛰다시피 무대에 오른 감독은 제스처에서 재기 넘치는 말대꾸까지 영락없는 개구쟁이, 바로 악동이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겨우 두 번째 만든 장편영화로 세계 영화계에 자기 존재를 각인한 그가 바로 스페인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이다.

파릇파릇한 이십대를 막 통과한 탓일까,아니면 출국 직전 발목을 삔 때문일까. 지난 8일 한국을 찾은 그에겐 4년전의 까불거리던 면모는 오간데 없었다."까탈맞게 굴어 대접하는데 애를 먹는다"고 수입사측 관계자도 귀띔했다. 그럴 만도 하지 싶다.

톰 크루즈가 돈을 대고 니콜 키드먼을 주연으로 내세워 만든 세번째 영화 '디 아더스'(11일 개봉) 가 미국에서 대단한 흥행을 거두고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개인 생활이나 태도에 변한 게 없다"며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할리우드에서 성공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LA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나를 알리고 다녔을 게다. 그러나 지금 난 마드리드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러면서 아메나바르는 "유능한 유럽 감독들이 할리우드로 건너간 뒤 초라하게 영화 인생을 마감하는 걸 너무 많이 봐 왔다. 그런 길을 되밟을 생각은 없다. 감독으로서의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영감이 안 떠오르는 영화,자신없는 영화는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절대 찍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여전히 패기가 짱짱하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은 어디인가, 라는 철학적인 성찰에 관심이 많다"는 그는 "이런 질문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장르가 공포물이나 서스펜스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잉그마르 베르히만처럼 철학적 질문을 영화에 직설적으로 던지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나는 관객과 함께 유희하면서 그들에게 철학적인 암시를 던지고 싶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각본과 음악, 연출을 늘 혼자서 감당한다. 음악을 따로 공부한 적은 없고 그냥 어릴 때부터 악기를 갖고 놀면서 즐기듯 작곡을 배웠단다.

"나는 영화광 출신이 아니다. 부모님이 TV도 못보게 해 어릴 땐 미스테리 소설을 주로 읽었다. 열 살이 지나면서 비디오로 '에이리언'과 '오멘' 같은 작품들을 반복해서 봤고 14세 무렵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처음 만났다. 극장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감독을 묻자 "스티븐 스필버그와 스탠리 큐브릭,그리고 히치콕이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다루는 방식에서, 큐브릭은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이라는 면에서, 스필버그는 관객의 심리를 다루는 기법에서 나의 귀감"라고 털어 놓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탁월한 테크니션 쪽에 가깝다.

그가 꼽는 감독의 조건은 무엇일까."우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 감독은 외교관 같은 거다. 작업에 참여하는 다양한 이들의 요구와 필요를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두번째 덕목은 "자신의 영화적 신념과 비전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영화적인 야망을 갖되 현실에서 발을 뗀 허황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조감독 경험이 없다. 19세 때 부터 단편을 세 편 만들었고 대학 4학년 때 쓴 각본을 보고 제작사가 연출을 맡겨 완성한 영화가 '테시스'다."

'테시스' 역시 현실과 비현실, 다큐멘터리적 요소와 극영화를 오가는 작품으로 스페인의 고야상에서 7개 부문을 석권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다. 부디 '스페인의 히치콕'으로 꽃피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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