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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의 당운 걸머진-새 기수 유씨의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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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민중당 운영회의는 유진오 (전 고대 총장)씨를 내년 선거에 내세울 대통령 후보로 내정했다. 당비주류 일각은 유씨 지명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주류 지도부는 지명 교섭 과정을 통해 비주류 반발의 길을 차단하고 오는 22일 지명 대회에서 무난히 대통령 후보로 밀어 올리게된 것이다.
대통령 후보의 당외 인사 교섭은 지난 7월 재야 세력에 관한 12인 대책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다급한 현실 문제가 됐다. 그동안의 교섭은 이범석·백낙준·유진오씨 선을 맴돌았다. 맨 첫 교섭 대상은 백낙준씨로서 박순천 유진산씨의 주류와 비주류의 서범석씨의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유진오씨의 대통령 후보 얘기는 조국 수호 협의회 측과 민중당과의 합류 교섭 때 박병권씨가 유씨에게 권유한 일이 있기는 하나 이때는 민중당 인사들에게까지 얘기가 연결되지는 않았다. 당초의 교섭은 당 지도부가 백씨와 교섭을 펴고 있으면서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중재씨가 유진산 고흥문씨의 양해하에 유씨와의 접촉 의향을 타진해 온 정도. 그러던 것이 지난 13일 유진산 이상철 김영삼 김대중씨 등이 이중재 채문식씨를 당의 실질적 공식 대표로 보내면서 교섭은 본격화했다.
이범석씨의 대통령 후보 얘기는 연초 조국 수호 협의회의 예비역 장성단과 합류 협상 때 성숙되는 듯 했으나 합류가 깨어지면서 함께 유산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씨 등은 이씨를 단념하지 않고 있었는데 15일 대구 강연에 갔던 유진산씨가 노산 이은상씨와 함께 서울로 와서 노산을 이씨에게 보낸 것이 첫 공식 교섭이 되었다.
이 세 갈래 교섭이 결국 유씨로 낙착된 것은 이·백 양씨의 까다로운 조건에 비해 유씨만이 선뜻 나서주었기 때문이다.
백씨는 다수 야당이 난맥을 이룬 현실이 하나로 정돈되는 뚜렷한 전망을 전제로 했다. 그는 야당의 단일 후보 실현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전망이 서고 양당제의 기틀을 잡는 원칙이 선행되어야 하며 신한당의 윤보선 후보도 이 원칙에 호응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 민중당 측은 단일 후보는, 지명을 수락하고 윤씨와의 대결에서 윤씨를 압도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설명했으나 백씨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수락과 거부의 중간 지대에서 교착되고 말았다.
이씨는 당권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노산으로부터 교섭을 받은 다음날인 16일 유진산씨에게 ①당수직을 줄 것 ②측근의 호응을 얻기 위해 지명 대회를 3, 4일 연기할 것 ③국회의원 공천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전하고 충남 지방으로 떠나버렸다.
유씨만은 당 지도부와 만났을 때 민중당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체질 면에서 갖추고 있다고 보아왔다고 말했으며 주류와 비주류로 얽힌 여러 갈래 혼선에 대해서도 교련을 맡아 운영하면서 민주주의가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면서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으며 까다로운 조건 없이 지명 교섭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이 교섭의 과정에서 신한당과 당내 친신한당계의 방해 공작이 큰 장벽이었으며 백씨의 교섭 실패는 여기에 한 가닥 원인이 있다고들 한다.
어쨌든 유씨는 67년 선거의 민중당 기수로 선택되었다. 유씨는 이 선거전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대결하기 전에 신한당의 윤보선 후보와 경쟁해야 한다. 그는 거당적 지지가 필수 조건이었지만 교섭 과정에서 서범석 홍익표씨 등 비주류 일각의 배척을 받았다. 배척의 이유는 그가 군정 하에서 재건 국민 운동 본부장을 지냈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나 주류지도부는 고대 교우회의 조직과 인촌의 후광, 그리고 지금껏 폐쇄적 기질로 퇴조해 온 야당이 대담하게 신인을 발탁했다는 것으로 국민한테서 기적이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다. 22일의 지명 대회가 끝나면 그는 곧장 경주에 나설 계획이며 그때 그에 대한 평가와 함께 민중당의 선택의 잘잘못도 판단될 것이다. <이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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