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만의 미소…서라벌의 예지-전통(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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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 파손되었다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여기 사리공에서 나온 일괄 유물들은 석가탑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으로 만들, 너문도 중요한 발견이었다.

<압권은 본판인쇄한 다라니경 손색없는 세계적 문화사 자료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킨 인쇄술은 중국에서 먼저 일어나 세계각지로 퍼져나간 것인데 중국에서 목판인쇄가 꼭 언제 발명되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년대가 확실한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목판인쇄예로는 영국의「슈타인」경이 1907년에 돈황에서 발견 구입한 당성통9년(868년)판의 금강산 1권이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보다 약 1세기 앞서는 인쇄물이 남아 있어 일본인들은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고 만방에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실물상으로는 일본에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 남아 있고, 또 그것이 일본에서 인쇄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쇄술이 중국으로부터 직접 또는 신라를 거쳐 들어갔을 것임은 일본인 학자 자신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이 다라니는 인쇄물로서는 아직 미숙한 상태이며, 따라서 인쇄술의 발명은 이 다라니의 시대, 즉 8세기 중엽보다 과히 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석가탑 「다라니」의 발견은 이 인쇄술 발명의 연대를 적어도 1세기는 더 올려놓는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이 다라니가 일본의 그것보다 비교가 안될이만큼 인쇄기술이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 최고니, 최대니 하는 미국식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유치한 취미는 가져서도 안되지만, 이 조그만 한국에서 그렇게 막중한 「세계적」 문화사자료가 나와 한국의 이름과 그 영광스러운 문화가 널리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며 당분간 우리 한국인들이 이 석가탑 「다리니」를 앞에 놓고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고 떠들썩해도 아무도 우리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8세기란 시대성 지녀 「사산」미술서 받은 강한 영향>
그러면 이제 이 다라니경과 함께 나온 다른 사리 유물에 대해서 일언해야 하겠다. 이 사리유물의 하나하나가 중요한 미술사적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사리함과 두 개의 은제 사리함, 2장의 동경 그리고 직물류라고 하겠다. 이러한 유물들의 자세한 보고와 기술은 앞으로 채홍섭 교수를 비롯한 관계 담당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지만, 투각 사리함에서 보는 엄격한 좌우 상칭으로 된 초화문이나, 또는 은함의 조각적 효과를 겸한 타출문 공간을 메운 소권문(어자문)등은 모두 8세기라는 시대성을 나타내면서「페르샤」의「사산」(Sassan)미술로부터의 강한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서기 3세기께부터 7세기 전반엽에 걸쳤던 사산 왕조의 장식성에 넘친 미술은 서쪽으로는 유럽의 중세미술에 영향을 주었고, 동쪽으로는 중국으로 퍼져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신라통일시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용기들은 당시의 그러한 국제양식을 받아들인 통일신라공예품의 희귀하고도 완벽한 유존예이며 앞으로 신라 미술사나 한국미술사에 있어서도 빠뜨릴 수 없는 유물이요, 작품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전혀 문양이 없는 두 개의 동경은 이러한 사리용기에 비하면 미술적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것 같지만, 문양으로 뒤덮인 번잡한 당경 양식이 아니고, 따라서 이것이 바로 신라경일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고신라, 통일신라 할 것 없이 현존하는 신라경이 5, 6개에 불과하며 이 2예가 최초의 확실한 통일신라경이라는 점에서 이 석가탑거울이 가지는 의의는 너무나 크다.

<신라인의 옷자락 만지는 자랑, 직물 등 영구보존 시설 아쉬워>
한편 반출한 직물류는 보존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으나, 이것이 현존하는 신라시대 직물의 전부이니만큼 우리의 문화사·공예사의 자료로서의 가치는 여기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쇄된 신라의 종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어느 고분부장품보다도 질적으로 우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8세기로 올라가는 세계의 인쇄사 자료가 나타났으며 우리가 까마득한 태고처럼 생각하던 신라인들의 옷자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쁘고도 자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그저 기뻐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이 막중한 보물들을 영구보존할 시급하고도 무거운 임무가 있다. 우리국민들이 서로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현대식 문화재 보수보존 센터를 마련해야할 시기가 드디어 내도한 것 같다. <서울대학교박물관장>

<관계기사 6면에>

<사진설명>
(1)금동방형사리외함(높이18cm 뚜껑폭17·2cm 연봉구슬65개 심엽형영락36개) (2)은도금난형외합(높이11·5cm 지름6cm 연봉구슬5개) (3)은제내합(높이6·5cm 지름5·5cm) (4)유리사리병(높이8cm 지름5cm 사리46과) (5)금동방함(높이 5·5cm 가로6cm 세로3·3cm) (6)목제주칠사이병(높이5c 지름2cm 사리1과) (7)은제항아리(높이4cm 지름3cm 금판에 지름9mm의 은제소함을 싸고 사리는1과) (8)동경편(4분의1로 반지름8cm 무문) (9)동경(지름7cm 무문) (10)비취모여곡옥(질이7cm) (11)비취구슬(지름1·8cm) (12)비취과형구술(길이2·5cm) (13)수정6각구슬 (길이3cm) (14)수정구슬(높이5cm) (15)동제비천상(높이4cm) (16)유향봉지(묵필로 우로부터 원한대덕, 지영중대사, 영한화상) (17)구슬2줄 (18)금동고리2개(폭2cm) (19)목판본 「대다라니경」두루마리(폭 6cm길이 약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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