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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터지로 풀어놓은 서정의 물감 순·수·터·치

중앙일보

입력

'마리 이야기'를 보는 동안 생각은 두 갈래로 달린다. 하나는 '이것이 정말 국산 애니메이션인가'하는 온전한 감탄. 다른 하나는'이렇게 잔잔하고 순한 이야기에 관객이 들까'하는 생뚱같은 걱정이다.


'마리 이야기'는 주먹구구식 기획이 만들어낸 과거의 '준비된 실패작'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그만큼 완성도가 높다.

이는 일차적으로 충분한 제작 기간과 제작비를 확보하고 기획부터 제작.마케팅.배급까지를 치밀하게 수행한 제작진의 공이다. 나머지는 제작진이 일궈놓은 텃밭에 그간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다진 내공을 훌훌 풀어놓은 이성강 감독에게 힘입은 바 크다.

1999년 '덤불 속의 재'를 발표해 국내 최초로 국제적 권위의 안시 페스티벌 본선에 진출했던 이감독. 그는 자칫 자기 안에 갇혀버릴 수도 있었던 단편작가로서의 예술성을 첫 장편에 서정적이고 섬세한 팬터지로 풀어놓는 데 성공했다.

영화 첫 장면부터 이러한 환상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커다란 잠수함 모양의 애드벌룬이 떠 있는 서울의 회색빛 하늘. 갈매기 한 마리가 뿌연 하늘을 유영한다. 도시와 갈매기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어떤 날'출신의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차분하고도 감성적인 선율에 실려 눈앞에 펼쳐진다.

실사 영화 못잖은 자유로운 시점 이동이 돋보이는 이 도입부는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플라잉캠이라는 특수 카메라를 사용한 것. 약 5분 분량의 이 장면을 위해 6개월이 소요됐다.

주인공 남우(목소리 연기 이병헌) 는 아버지 없이 할머니(나문희) .엄마(배종옥) 와 사는 바닷가 소년이다. 남우는 엄마에게 연정을 품고 접근하는 어부 아저씨(안성기) 가 괜히 싫다.

게다가 단짝 준호는 곧 뭍으로 전학을 간다. 누구에게 딱히 풀어놓지 못할 답답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먹먹하던 남우는 어느 날 신비한 유리구슬을 통해 환상 속에서 소녀 마리와 만난다. '이웃집 토토로'와 흡사한 느낌을 주는 마리와의 여행은 남우의 외로움을 치유하는 탈출구가 된다.

스토리에는 고저(高低) 가 없다. 준호 아빠와 어부 아저씨가 탄 고깃배가 풍랑에 휘말리다 무사히 귀환하는 작은 사건이 한번 있을 뿐이다. 엄마의 재혼 여부나 친구와의 이별은 큰 갈등 요인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통과의례에 가깝다.

'엽기'나 '조폭'등이 우세했던 지난해의 한국 영화시장을 떠올릴 때 상업적으로 얼마나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배우의 얼굴이 단박 떠오르는 목소리 연기도 옥에 티다.

그럼에도 다시 찬사로 돌아간다. 한 장면 한 장면 떼어놓고 봐도 그 완성도가 감탄스러운 그림은 3D 작업을 기본으로 하고 컴퓨터의 매끄럽지 못한 흔적을 지우기 위해 2D로 일일이 다시 손을 본 순전한 노동력의 성과다.

또 1초에 12프레임을 사용함으로써 8프레임을 쓰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부족한 사실성을 보충하는 동시에 24프레임을 쓰는 디즈니식 애니메이션에서 찾기 힘든 동작의 맺고 끊는 강약을 보충했다. 그래서 동작의 연결도 큰 무리가 없다.

그간 연이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실패는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패배주의를 심어놨다. 지난달 말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 주최로 열린 시사회에 보기 드물게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마리 이야기'의 성공을 기원한 것은 이 작품에서 그간의 상처를 씻을 만한 작은 '불씨'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일 개봉. 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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