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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심은 「성직61년」|충남 강경 천주교회 「줄르·베르몽」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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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의 프랑스인」. 그는 평생동안 하루도 이땅을 떠나지 않았다. 61년이란 오랜세월을 오직 이땅에서 성직을 지켰고 어린 양떼를 지켜왔다. 충남강경천주교회 「줄르·베르몽」 (한국명=목세형)신부. 그는 지난7일 불란서 정부의 최고훈장 「레종·도네르」를 「샹바르」주한불대사의 손에의해 가슴에 달았다.
올해 86세인 그가 한국에 발을 디딘것은 1905년 10월10일.
그 후 「베르몽」신부는 고국 불란서를 보지 못했다. 8년만에 한번씩 있는 안식연가에도 귀국하지 않고 한국의 신도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불란서정부가 「레종·도네르」를 수여한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있는 불란서 신부가운데 두 번째로 이 영예의 훈장을 받았다. 또 한사람은 경북안동에 있는 「코요스」신부.
그는 6·25때 북괴에 납치되어 유명한 「죽음의 행진」 끝에 포로수용소에서 약3년간 고생을 치른 다음 「모스크바」를 경유 석방된 경력때문에 라틴에서 훈장을 받았다.
불란서 동남쪽, 「오트·잘프」라고 불리는 「알프스」고산지대의 촌락에서 1881년2월에 태어난 「베르몽」신부가 처음으로 한국을 알게된 것은 「파리」의 신학교 시절이었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먼곳, 뱃길로 동쪽 끝에 있는 나랄고 들었다. 그래서 젊은 「베르몽」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위해 한국의 선교사가되기로 결심했다.
1905년8월 「마르세유」항을 떠난 32명의 동료 선교사들 가운데 「베르몽」신부와 함께 한국에 온 신부는 「페트루스·시자레」(한국명=지사원·대전거주)신부이다. 「파리」외 외방전교회소속인 「베르몽」신부와 그 일행은 그 당시의 규칙에 따라 임지로 떠나면 고국에 다시 돌아가지 않게 되어있었다.
가족 친지들과 영원한 생이별을 하고 떠난 그들은 1920년부터 8년만에 한번씩 고국을 방문할 수 있는 안식연제도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베르몽」신부는 한번도 고국을 방문하지 않고 한국의 신도들과 고락을 같이했다. 일제말기의 박해도 참았고 6·25의 공산침략하에서도 견디었다.
동창생인 「시자레」신부는 그동안 세번 불란서를 방문했다. 1906년 설날,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송화다식을 먹었던 일을 잊지못할 추억이라고 말하는 「베르몽」신부는 그해 여름, 당나귀를 타고 전북고산에 전임되어 거기서 8년, 마산서 32년, 왜관에서 2년을 보내고 강경에 온지 19년째이다. 작년7월 마산시장으로부터 「행운의 열쇠」를 선사받기도 했다.
고국에 있는 형님의 손자들로부터 가끔 선물도 받고 있지마는 「베르몽」신부는 20세기의 불란서를 모른다. 「앙드레·지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했다. 그러나 그는 천주께 바친 일생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천주를 위해 살아온 육신을 한국에 묻겠다고 말했다. 한국인으로서 이 최고훈장을 받은분은 정일권국무총리와 백선엽주불대사 두분뿐이다. <임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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