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태가 자르르 애랑이 몸짓에 애간장 녹누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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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24면

사진 CJ E&M

창작 뮤지컬에 물이 올랐다. 연초부터 ‘여신님이 보고 계셔’ 등 웰메이드 소극장 창작뮤지컬들이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김광석 노래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그날들’을 비롯, 드라마로 인기를 끈 ‘해를 품은 달’, 영화 원작의 ‘써니’ ‘친구’ 등 기대작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2월 19일~3월 3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해외진출도 활발하다. ‘광화문 연가’ ‘빨래’ 등은 지난해 일본에 진출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오는 4월 도쿄 롯폰기에 개관하는 아뮤즈 뮤지컬 씨어터는 올해 라인업 7작품을 모두 한국 창작뮤지컬로 채웠다.
이처럼 창작뮤지컬 인기 속에서 ‘대한민국 제 1호 창작 뮤지컬’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1966년 서울 시민회관 초연 당시 4일 동안 1만6000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살짜기 옵서예’다. 서울시뮤지컬단의 전신인 예그린악단이 당시 뒤처진 우리 공연예술 문화를 업그레이드시킨다는 사명감으로 만들었다. 제작 박용구, 작곡 최창권, 연출 임영웅, 안무 임성남 등 당대 최고의 창작진과 전속 오케스트라, 무용단, 합창단을 갖추고 최고 인기가수 패티김 등 총 100여 명의 출연진을 무대에 세워 토착 창작뮤지컬의 가능성을 입증한 역작이다. 이후 간간이 앙코르 되다 1996년 6대 공연을 마지막으로 외국 라이선스 뮤지컬의 급물살에 밀려 역사 속에서 사라졌었다.

17년 만에 부활한 제1호 창작 뮤지컬

아뮤즈 뮤지컬 씨어터에 오르는 모든 한국 창작뮤지컬을 제공하는 CJ E&M이 ‘살짜기 옵서예’를 17년 만에 부활시킨 것은 K-뮤지컬 신화의 뿌리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차원의 해외진출을 도모하는 유의미한 작업이다. ‘2013 살짜기 옵서예’는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원작으로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작품을 동시대적 유머와 화려한 의상, 첨단 감각의 무대 메커니즘으로 리바이벌하는 과정에서 고전의 현대화와 한류 콘텐트 글로벌화의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우리 민족 특유의 골계와 익살의 향연. 외국 라이선스 대작처럼 감동의 드라마나 화끈한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시종일관 유쾌한 ‘흥’과 기분 좋은 들썩거림이 전 연령층의 관객에게 어필한다. 자기주도적인 여성의 활력과 에로티시즘이 어우러진 적절한 통속성도 대중성을 확보하기에 딱 좋았다. 기생 애랑 역의 김선영은 민요 창법을 적절히 살리면서 교태가 철철 넘치는 맞춤연기로 단연 노련미가 돋보였다. 배비장(홍광호최재웅)이 오페라가수 뺨치는 진지한 창법으로 죽은 아내에 대한 순정을 노래하다 애랑에 홀려 마구 망가지는 대목은 단연 백미였다. 번안된 억지 웃음이 아닌 한국적 유머이었기에 한층 편안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둘째, 아름다운 제주 풍광으로 한국의 멋을 한껏 과시한 무대다. 영상을 활용해 실제로 배를 타고 제주로 향하는 느낌을 주는 서막을 거쳐, 유채꽃 들판으로 장식된 세트를 기본으로 역동적인 폭포와 신비로운 숲의 영상이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해 관광상품으로서의 가능성까지 담아냈다.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아름다운 의상도 볼거리. 단청에서 모티브를 딴 비장들의 의상과 전통적이면서도 섹시미를 잘 살린 기생들의 의상들은 화려한 뮤지컬 무대에 제격이었다. 3D매핑 기법이 사용된 돌하르방도 ‘첨단기술’이라 하기엔 실망스러웠지만 웃음과 함께 제주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활약했다.

셋째, 스토리를 초월한 해학과 풍자미다. 이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방자(김성기임기홍)다. 꾀 많은 하인이 양반을 조롱하는 플롯은 하층민 중심인 우리 마당극의 뼈대인 동시에 하인이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리며 귀족 주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근대 서구의 익살극 코메디아 델 라르테를 닮았다. 한바탕 유쾌한 소동을 통해 계급 간 갈등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플롯을 동서양이 공유한 셈이다. ‘살짜기 옵서예’ ‘동곳의 노래’ 등 주요 넘버가 상황에 따라 변주되며 풍자에 적극 기여하는 방식도 센스가 넘쳤다.

원작과 달리 러브스토리가 개입하는 것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이 무대의 미학은 스토리 라인이 아닌 익살과 해학,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즐거움에 있다. 지극히 한국적 소재를 흥겨운 민요풍 노래와 풍자적 양식에 해피엔딩 러브스토리까지 가미해 세계 무대에 통할 보편성을 확보한 것이야말로 해외진출 러시에 즈음해 새삼 되새길 만한 대한민국 창작뮤지컬 1호의 위엄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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