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은 또 자랄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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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형식을 응용한 그림책 『수염할아버지』를 보면 '우리도 그림책을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큼직한 판형의 책자엔 위.옆.아래에서 마구 카메라를 들이댄 듯한 다양한 앵글의 그림만 가득하다. 30여쪽을 모두 넘기도록 글이라곤 "옳지""아하""룰룰룰루~" 등 감탄사류 몇 개가 거의 전부다.

하지만 유아용 그림책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꼼꼼히 그림들을 들여다보며 한 편의 따스한 이야기를 완성해보지 못한다면 이 책의 의미는 반감된다.

생각하며 봐야 하는 '피곤한', 하지만 그림과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유머와 인간미가 그 피곤함을 어느새 잔잔한 감동으로 바꿔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수염할아버지'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외모에 장난기도 넘친다. 빨간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카페에서 이웃 할머니와 데이트를 즐기는 멋쟁이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트레이드 마크인 길고 풍성한 흰수염은 그야말로 다용도다. 페인트붓 대용에 아이들 놀잇감이 되기도 하고, 산뜻한 연두빛 정장에 리본 모양으로 묶으면 나비넥타이가 부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낚시터에 갔던 할아버지는 강풍에 날려온 아기새가 땅바닥에서 울고 있는 걸 발견한다.

할아버지의 수염은 곧 푹신한 둥지가 된다. 점점 어둠은 깊어가고….

장면은 바뀌어 할아버지네 화장실. 할아버지는 거울을 보며 조금은 아쉬운 듯 "괜찮아, 수염은 또 자랄 테니까"하고 중얼거리더니 행복한 표정으로 잠이 든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글은 거의 없어도 작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아니,5~6세 이상의 아이들이 볼 그림책은 나름대로 철학이 담긴 탄탄한 이야기 뼈대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우리 창작 그림책이다.

여기에 세부묘사는 섬세하면서 색감.구도는 과감한 한성옥씨의 그림은 국내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듯 싶다.

한씨는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시인과 여우』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현지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그림작가.

일본의 전통시인 바쇼의 이야기를 담은 『시인과 여우』도 이번에 함께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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