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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 통한 변화’ 동방정책으로 통일 초석 놓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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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호 28면

1970년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양반 도대체 어디 있지? 쓰러졌나?” 뒷줄에 있던 사진기자들이 정신없이 앞으로 나왔다. 빌리 브란트 총리(1969~74년)가 갑자기 카메라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변에선 기겁했다. 1970년 12월 7일, 독일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희생자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사진기자들은 황급히 셔터를 눌러댔다. 브란트는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무릎을 꿇고 묵념하고 있었다. 30초쯤 흘렀다. 그는 주위에서 내민 손을 외면한 채 혼자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그곳은 지옥이었다. 수많은 유대인이 죽어나갔다. 브란트는 “이곳에 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각본 없는 행동이었다.

‘행복한 경제강국’ 독일의 리더십 해부 ④ 빌리 브란트

브란트의 진심 어린 과거사 사죄는 ‘나치 악몽’을 털고 독일을 세계무대에 복권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될 사람이 독일 국민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독일 언론들은 보도했다. 브란트만큼 독일의 국민감정을 양극단으로 몰고 간 정치인도 없었다.

독일 북부 뤼벡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헤르베르트 프람(브란트의 본명)은 젊은 시절 노르웨이·스웨덴으로 망명해 나치세력과 투쟁했다. 47년 그는 언론인으로서 베를린에 둥지를 튼다. 당시 베를린은 미·소·영·불 등 4대국이 점령하고 있던 세계의 ‘변방’이었다. 스탈린과 동독 정권은 베를린을 봉쇄하고 장벽을 쌓았다. 브란트가 ‘비전의 정치인’으로 행동한 첫 장면은 헝가리 사태 때였다. 53년 동베를린에 이어 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민혁명이 소련군 탱크에 의해 다시 잔인하게 진압됐다. 베를린 시민들은 시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때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수천 명의 젊은이가 횃불을 들고 분단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돌진한 것이다. 브란트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우리가 서로 대립하고 도발한다면 이는 반대편을 도와주는 것”이라며 자제를 호소했다. 그러곤 “독일국가를 부르자”고 주문했다. 그 덕에 시위는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브란트는 이듬해 10월 3일 베를린 시장으로 선출됐다.

1970년 동독 에르푸르트에서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앞줄 왼쪽)와 동독 빌리 슈토프 총리(앞줄 오른쪽)가 만나 첫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젊은 시절 나치와 투쟁 … 71년 노벨평화상
베를린은 브란트의 비전과 용기가 필요했다. 61년 8월 13일 동독 정권은 동베를린에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동독인의 대량 탈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동분서주했다. “여보게들 뭐 하고 있나?”라며 장벽을 쌓는 동독 군인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동독 정권에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에게 “이런 미친 짓을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총리였던 아데나워는 베를린을 외면하고 선거 유세를 다녔다. 하지만 사민당 총리 후보였던 브란트는 유세를 중단한 채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비전의 정치가’답게 그는 59년 수도 본의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사민당이 케케묵은 이념·계급 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환골탈태하는 데 앞장섰다. 큰 키와 고수머리의 잘생긴 얼굴, 그리고 지성과 카리스마를 갖춘 브란트는 ‘독일의 케네디’였다.

‘코끼리 결혼식’으로 불리는 기민당(CDU)-사민당(SPD)의 대연정을 거친 뒤 69년 10월 전후 처음으로 사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 중심에 브란트가 있었다.

그는 총리 취임연설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약속했다. 정치 민주화에 이어 사회·경제 민주화를 제시했다. 기회균등이 목표였다. 1971년 ‘연방교육진흥법’을 제정하고, 교육예산을 크게 늘렸다. 국민 누구나 원하면 국가 지원으로 교육과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대학등록금이 없는 대학생들은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중산층·서민 가정의 대학생은 월 700유로(약 100만원)를 지원받는다. 취업 이후 그중 50%만 갚으면 되는데, 상위 20% 성적으로 졸업할 땐 20%만 갚으면 된다.

노사관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71년 ‘경영기본법’을 제정해 노조 대표들이 회사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노사공동결정법’이라고도 불린다. 핵심은 회사 경영의 주요 사항을 노사 공동으로 결정하는 제도다. 경제민주화의 가장 상징적인 조치였다. 다만 종업원 2000명 이상 기업에만 적용된다. 사회분야에서 가장 개혁적인 조치는 연금개혁법(72년)이었다. 아데나워 정부 때 연금제도가 정착되었지만 브란트는 개인 불입금액과 상관없이 누구나 연금을 받게 했다. 의료보험 및 재해보험 개선, 어린이 양육지원 등 브란트 정부는 ‘인간적인 일터 만들기’를 내걸고 중산층·서민의 삶을 개선했다. 브란트 정부 시절 개인 가처분소득이 높아지고, 유급휴가 일수가 과거의 두 배쯤인 37일로 늘어났다. “인정과 정의가 넘치는 사회”라는 모토를 내걸고서다.

브란트 시대의 클라이맥스는 ‘동방정책(Ostpolitik)’이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외교사를 쓰기 시작했다. 총리 취임연설에서 “독일은 두 개 국가가 존재한다 해도 서로 외국은 아니다. 두 나라는 특수한 관계다”라고 천명했다.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그 전까지 서독은 동독과 국교를 맺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내걸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독 정치인들은 동독을 ‘저쪽’이라고만 표현했다.

브란트는 자신의 책사 에곤 바가 제시한 ‘접근을 통한 변화’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아데나워가 서방과의 연대로 ‘강건한 현실주의’ 정치를 추구했다면, 브란트는 ‘이해와 협력’을 통한 개입 전략을 편 것이다.

브란트 정부는 전략적으로 소련, 폴란드, 체코, 동독 등 네 가닥의 외교목표를 동시에 공략했다. 관건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이었다. 수많은 상호방문과 협상 끝에 드디어 70년 8월 12일 브란트와 브레즈네프는 독·소 조약에 서명했다. 동방정책의 가시적 성과는 소련에서 서독까지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경제협정이었다. 소련은 20년간 520억 ㎥의 천연가스를 독일에 공급하고, 그 대가로 연간 25억 마르크(약 1조2500억원·70년 기준 금액)를 챙겼다. 일종의 윈윈 모델이었다. 보수세력은 ‘독일이 소련에 종속될 수 있다’며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73년 제1차 오일 쇼크 이후 이런 목소리는 잠잠해졌다. 그는 71년 독일 국민으로서 네 번째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브란트는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에도 나섰다. 70년 독·폴란드 조약을 맺고 국경문제를 마무리했다. 2차대전 이후 오데르-나이세 강으로 상징되는 양국 국경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이는 동유럽권 국가들에 독일의 대표는 서독이라는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70년대 중반 ‘김대중 구명운동’에 앞장
브란트는 동독과의 협약을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70년 3월 19일 동·서독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첫 회담 장소는 동독의 에르프르트 호프 호텔이었다. 동독 시민들이 경찰 제지선을 뚫고 들어와 ‘빌리, 빌리’를 외쳤다. 같은 해 5월 21일 서독 카셀에서 열린 2차 정상회담을 통해 그는 베를린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인적·물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주력했다. 양측 정상은 ‘상호방문과 서신교환’ 협정에 합의했다. 이는 훗날 동·서독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서독은 ‘독일 문제’를 두고 소련이나 동독과의 협상에서 한 번도 주도권을 내준 적이 없었다. 야당인 기민당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비판적으로 쳐다봤다. 72년 기민당은 동방정책에 비판적인 자민당·사민당 소속 의원들을 빼내오기 시작했다. 소연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리 불신임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하지만 거꾸로 기민당·기사당에서 반란표가 나와 브란트 내각은 그대로 유지됐다.

72년 총선 뒤 재선에 성공했지만 브란트의 인기도 시들어갔다. 부총리 및 외무장관 3년에 이어 총리직 4년차를 맞아 브란트의 심신도 지쳐가고 있었다. 당시 그는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독일 언론은 “브란트의 사임은 돌발적 성격이 강했다”고 평가한다. 73년 5월 독일 연방보위청이 당시 내무장관(한스 겐셔)에게 “총리실 소속의 비서관 귄터 기욤은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 요원”이라고 보고했다. 겐셔는 이를 브란트에게 보고했지만 그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욤이 체포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졌다. 게다가 브란트의 여성 스캔들까지 불거지기 시작했다. 74년 5월 6일 브란트는 제1공영방송(ARD)에 출연해 사임을 발표했다. 후임으로 사민당 출신 헬무트 슈미트가 선출됐다. 사실 간첩사건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내무장관이나 법무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브란트는 왕성하게 활동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의장을 맡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유엔은 브란트에게 지구촌 빈부격차 해소와 기아·독재·내전에 허덕이는 ‘제3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관련한 ‘브란트 보고서’가 나온 배경이다. 그는 한국의 인권에도 관심이 높아 70년대 중반 ‘김대중 구명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88년 ‘세기의 증인’이라는 TV프로그램 인터뷰에서 브란트는 ‘최대 업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즉 독일의 이름과 평화라는 개념이 다시 조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것이다.”

그의 업적은 동유럽권과의 데탕트와 유럽 평화를 위한 노력에서 두드러졌다. 생이 다할 무렵인 89∼90년 통일정국에서 그는 마지막 불꽃을 살랐다. “함께 속했던 것이 이제 같이 성장하는구나(Jetzt wchst zusammen, was zusammengehört)”라는 명언을 남겼다. 92년 10월 8일 통일의 결실을 지켜보며 브란트는 눈을 감았다. 



김택환 1983년부터 10년간 독일에서 공부한 뒤 학자·언론인 생활을 하며 독일을 꾸준히 공부해 왔다. 대한민국의 미래 모델을 모색하기 위한 『넥스트 코리아』를 최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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