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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전쟁과 한국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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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라는 저서에서 한국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미국과 같은 큰 나라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정치사회 흐름은 내부적 요인보다 주위 강국들의 국내적 상황변화에 더 큰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해방 후 한국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의 해방 후 역사를 모두 연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찌 역사뿐이랴. 경제는 더욱 그렇다. 한국경제의 흐름은 세계경제 흐름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1980년대 전반 우리나라가 물가안정을 이룰 수 있게 된 데에는 당시 전두환 정부와 김재익 수석의 역할도 컸지만 그보다 미 연준이사회 의장이었던 폴 볼커의 뚝심있는 통화긴축정책이 없었다면 미국과 전 세계적 인플레는 안정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결과 한국의 안정화 정책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2차 오일쇼크와 세계경제침체로 인한 부산·마산의 수출산업 어려움이 가중되지 않았다면 장기집권과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10·26사태는 없었을지 모른다. 일본의 부동산·증권 거품이 1991년 이후 꺼지면서 일본은행들의 부실채권이 서서히 늘고 이들이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채권을 회수하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1997년 아시아·한국의 외환위기는 촉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1980년대 말 거품을 키운 일본의 금융정책이 없었다면, 그리고 일본이 저금리 정책을 취해 거품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1985년 플라자 협정에 의한 엔화의 지속적 절상이 없었다면, 아마도 1997년 환란으로 인한 김대중 정부의 출범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비효과라고 하지 않는가.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언젠가 지구의 다른 편에서 폭풍우를 일으키게 된다는. 그런데 지금은 나비가 아니라 독수리들이 퍼덕거리며 날갯짓을 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라고 불리는 일본의 새 경제정책은 불과 두 달 만에 엔화가치를 15% 가까이 끌어내려 놓았다. 미 연준의 버냉키 의장은 향후 적어도 2년간은 제로금리를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양적 팽창을 지속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의 드라기 총재도 비슷한 저금리, 양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가위 통화전쟁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들의 날갯짓이 동북아 대륙의 끝에 매달려 있는 한국경제에 어떤 폭풍우를 몰고 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머빈 킹 총재의 뒤를 이어 오는 7월부터 영국은행의 통화정책을 맡게 될 마크 카니 현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의 청문회가 최근 영국의회에서 진행되면서 논객들 간 통화정책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 연준과 영국은행,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은 과거 경제학 교과서에서 볼 수 없던 초저금리와 양적 팽창 정책을 써왔다. 이러한 정책이 세계경제가 위기에서 공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침체에서 회복을 이뤄내지는 못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정책이 향후 인플레 없이 경기회복을 주도하게 된다면 1960년대 이후 경제학계의 주류를 이뤄온 통화론자들의 이론은 모두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다. 일단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고 신용경색이 풀리게 되면 엄청나게 풀린 통화는 인플레를 촉발하게 될 것이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각국이 적시에 출구전략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지금의 상황은 어찌 보면 1930년대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과 유사하다. 경기침체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각국의 정치는 국민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결국 환율의 경쟁적 절하와 수입장벽 강화로 ‘근린궁핍화(beggar thy neighbor)’ 정책을 취하게 되고 이것이 다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정치지도자들의 입지는 그때보다 더 불안정하며 정책은 더 근시안적이 되고 있다. 지금 개별 국가의 국내경제 사정으로 보아서는 타당해 보이는 정책들이 세계경제 전체로 볼 때는 또 다른 파국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G20이 이런 구성의 오류를 제어할 수 있는 기제를 갖춘 것도 아니다.

 대한해협을 건너, 태평양을 건너, 또 대서양 너머 여기저기서 퍼덕거리는 날갯짓이 이미 원화절상이라는 기상변화를 한반도로 몰고 오고 있다. 다음 주 출범하게 되는 박근혜 정부가 이루게 될 경제적 성과는 내부적 요인 못지않게 외부적 환경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외부환경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고, 또 5년 후 우리 경제가 서있어야 할 위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경제정책을 추진해, 당선인이 약속한 국민행복시대를 열게 되길 바란다.

조 윤 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