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당선前부터 고건 점찍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대통령 선거 기간에 이미 고건(高建)전 총리를 점찍고 있었다고 한다. 한 핵심측근의 말이다. 盧당선자가 지난해 12월 23일 '개혁대통령-안정총리'카드를 언급한 것도 자신의 이런 구상을 내비친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盧당선자의 구상이 실현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盧당선자의 생각을 감지한 주변인사들부터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측근 그룹마저 "총리는 고건이야, 고건…"이라면서 "어떻게 바꿔봐야지. 두고보자"고 말했다. 민주당과 盧당선자를 지지한 네티즌 사이에선 '고건 불가론'이 일었다.

여론조사에서도 高전총리는 높은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지난 12일 盧당선자의 입에선 "국민이 개혁적이고 깨끗한 인물을 원한다"는 말이 나왔다.

이때부터 상황은 혼미를 거듭했다. 高전총리를 대체할 인물로 정운찬(鄭雲燦)서울대총장.박세일(朴世逸)서울대교수.김종인(金鍾仁)전 복지부 장관 등이 검토됐다. 이와 함께 대통령 정치고문으로 교통정리가 됐던 김원기(金元基)고문이 다시 부상했고, 오명(吳明)아주대총장이 안정형 총리의 대안으로 거명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본지 기자들과 접촉한 후보들의 반응에는 미묘한 차이가 감지됐다. 高전총리는 15일 서울 종로5가 여전도회관 10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개혁과 안정의 상관관계에 대해 "혼란 속에 어떻게 개혁을 하느냐. 개혁과 안정은 보완관계"라며 이른바 '개혁대통령-안정총리'구도가 바람직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개혁총리'로 거명됐던 박세일 교수는 16일 밤 민주당 정대철 최고위원과 만난 직후 본지 기자에게 盧당선자와 비공개 면담(14일 저녁)을 했음을 시인했다. 朴교수는 "구체적인 자리를 얘기하면 거절하려는 생각으로 나갔는데, 그냥 도와달라고만 하더라"고 말한 뒤 "인수위를 비롯해 盧당선자 측근들과 나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이는 고사의 의미와 함께 스스로도 자신의 기용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다는 뜻으로 이해됐다.

같은 날 鄭총장도 자신의 기용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 그는 "그동안 수차례 서울대총장 임기를 마치겠다고 공언해왔다"고 강조하면서 "세상에 약속을 지키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기 고문은 통화에서 "나하고 당선자가 내정한 것 없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때 盧당선자는 金고문의 경우 당개혁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金고문을 총리로 지명할 경우 의원입각 최소화 내지 배제 원칙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혼란스러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결국 盧당선자는 18일 밤 토론회에서 안정총리론을 거듭 확인했다. 이는 高전총리에 대한 지명방침을 기정사실화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막판 난점이 인사청문회였다. 한때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에 따라 오명(吳明)카드가 급부상했다. 두차례 장관(교통.체신)과 언론사 사장을 거쳐 대학총장을 맡고 있는 그를 김원기 고문을 추천했던 유인태(柳寅泰)정무수석 내정자, 盧당선자의 핵심측근인 김병준(金秉準)정무분과 간사 등이 강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육사 출신이라 병역문제가 깨끗하다는 점도 매력 포인트로 꼽혔다.

전혀 새로운 이름도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 밤 총리구도는 '2강2중'으로까지 확대됐다는 것이 盧당선자 핵심측근의 설명이었다. "2강은 고건.오명, 2중은 진념.박세일"이라는 것이다.

盧당선자는 끝까지 연막을 쳤다. 盧당선자는 이날 저녁 기자들이 "고건 총리가 맞느냐"고 묻자 끝까지 "틀렸다"고 말했다가 "아직 검토 중"이라고 말을 돌렸다. 그러나 이 시각 高전총리는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대표에게 병문안 가야겠다"며 은연중 총리내정 사실을 비췄다.

이런 과정을 거쳐 盧당선자는 高전총리를 선택했다. 일각에선 盧당선자 측이 高전총리 카드를 조기에 노출시킨 뒤 여론의 반응을 보아가면서 연착륙을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강민석.서승욱 기자msk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