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유율 50%육박 성장뒤엔 '조폭' 그림자

중앙일보

입력

단군 이래의 최고 호황’이라는 말이 호들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올해 한국영화계는 행복한 시절을 구가했다.

1999년 ‘쉬리’신드롬이 불을 지핀 한국영화의 열기가 ‘친구’‘엽기적인 그녀’‘‘조폭마누라’등으로 힘찬 행진을 계속한 해였다.특히 역대 최고 흥행작인 ‘친구’는 전국에서 8백만명이 관람해 조만간 한 편의 영화가 1천만명을 모으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느냐는 기대를 품게 했다.

올해 극장을 찾은 관객은 연말까지 전년도의 6천5백만명보다 25%나 늘어난 8천만명선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 한 사람이 연간 1.7편을 봤고 이 중 절반이 한국영화를 관람했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 49.5%는 지난해의 35.1%보다 10%이상 뛴 수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약진의 추동력으로
▶소재의 제한이나 검열이 거의 없어져 자유로운 창작풍토가 조성됐다는 점
▶젊은 감독과 참신한 기획자들이 관객의 기호를 정확히 읽어내는 아이디어로 대중 속을 파고들었다는 점
▶은행권까지 가세할 만큼 충무로에 자금이 풍부해졌다는 점
▶쾌적한 환경을 가진 멀티플렉스 극장이 급증한 점 등을 꼽았다.


특히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 체인인 CGV는 올 한해 전체 관람객의 15%가 넘는 1천3백만명을 소화하는 위력을 보였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없는 듯 질주하는 한국영화 산업에 불안한 눈길을 던지는 이들도 적쟎았다.

◇ 너무 빨리 터뜨린 샴페인인가=한국영화의 급팽창은 '이상 징후'이며 거품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대표자는 강한섭 교수(서울예대) . 그는 올해 한국영화의 활황은 시장의 자생적인 성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의 정책, 특히 영상산업에 국민 세금을 '쏟아부은' 결과라고 단언한다.

2000년부터 3년간 1천5백억원의 국고가 영화진흥기금 명목으로 영화계에 유입돼 영화 제작 붐을 주도했다는 것.

이같은 정부주도 영화진흥책이 90년대 초반 '결혼이야기''닥터 봉'등 히트작을 내며 서서히 성장하던 충무로의 자생력을 후퇴시켰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정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잃게 될 거라고 충고했다. 또 올해 한국영화 산업의 수익률은 -29.3%로 흥행작 몇 편을 제외하면 실리를 본 작품이 별로 없기때문에 최근의 붐은 실체없는 허상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현장 영화인들은 현재 충무로에 유입된 자금의 주류는 금융자본이나 벤처자본 같은 민간자금이며 국고에서 나온 금액은 비상업영화 제작.인프라 구축 등에 지원된다며 강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또 영화산업은 제조업처럼 투입량대 산출량의 단순 공식으로 접근할 수 없기때문에 업계 전체의 수익률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대신 이른바 대박영화들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영화시장이 커지고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도하는 보이지 않는 효과가 있는 만큼 영화시장이 자생력을 잃었다는 주장은 딴죽걸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 모래 위에 세운 성인가=한국영화에 대한 장미빛 전망이 환상일 수 있다는 지적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섬''고양이를 부탁해'와 같은 저예산의 '작은 영화'들이 관객의 외면을 받고 극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도 못한 채 일찍 간판을 내리는 현상을 보면서 생겨났다.

심지어 극장가에서는 평론가가 추천하는 영화,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라는 '낙인(□) '이 찍히면 객석이 썰렁해진다는 말도 돌았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조폭마누라'의 빅히트는 조악한 코미디물과 조직폭력배를 등장시킨 영화들이 올해 한국영화계를 풍미하지 않았느냐는 자기 반성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에 대해 한쪽에선 관객들이 선호하는 영화는 그 자체가 시대적인 정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조폭영화'의 인기몰이를 백안시하는 건 엄숙주의.엘리트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위기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홍콩영화의 쇠퇴는 무협코미디물이 득세하자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성의없이 급조하면서 관객들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라며 충무로도 자칫 이런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감독의 개성이 녹아있는 비오락영화가 극장가에서 외면받는 최근 모습은 그런 징조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 이 열기 계속될까=김대중 정부의 영상산업진흥책이 한국영화 시장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건 분명하다.

내년 대통령 선거 뒤 구성될 새 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할지 현재로서 단언할 순 없다. 그러나 새 정부의 정책을 괄호에 묶더라도 충무로가 현재의 탄력을 당분간 이어갈 건 확실해 보인다. 다만 올해 같은 열풍이 내년에도 계속 불어줄 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힘들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현재 영화제작 자금의 태반을 차지하는 금융자본을 경기의 변동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어 주시해야할 부분이다. 또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높아진 만큼 스크린쿼터제(한국영화 의무상영제도) 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 거세어 질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일정 궤도에 오른 한국영화 산업이 한 단계 높은 단계로 진입할 지 여부는 내년의 시장 향배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