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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의류를 사양산업이라 했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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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심상복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

그 시절 봉제는 눈물이었다. 1980년대 운동권 가요 ‘사계’는 이렇게 묘사했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소금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또 저물도록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서울 청계천 5~6가 평화시장이 그 중심이었다. 낡은 재봉틀이 내뿜는 실먼지는 10대 어린 누이들의 땀범벅 얼굴에 파운데이션처럼 들러붙었다. 열악한 환경과 장시간 노동은 그들의 여린 몸을 실밥처럼 힘없게 만들었다. 그런 아픔 속에서 수출탑은 나날이 뾰족하게 올라갔다.

 지금은 휴대전화와 자동차지만 당시는 봉제업이 수출역군이었다. 해외로 나간 동포들도 힘을 보탰다. 미국 뉴욕에 한인봉제협회가 만들어진 건 81년이었다. 한때 회원사가 700개를 넘었다. 하지만 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고, 이어 중국이 수출전선을 장악해 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뉴욕 봉제업체는 한때 60개로까지 쪼그라들었다가 지금은 100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름도 한인의류산업협회(KAMA)로 바꾸었다. 과거엔 ‘걸레장사’라고 자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유명 브랜드와의 협업에 힘을 쏟고 있다. 며칠 전 뉴욕 방문에서 만난 곽우천(55) KAMA 회장은 “요즘 한인 업체들은 소량 다품종 전략으로 고급화와 브랜드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도 뉴욕의 유명 브랜드 ‘띠어리(Theory)’와 제휴하고 있다.

 우리는 한때 섬유와 의류를 사양산업으로 분류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옷을 입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사양산업이란 말인가. 실제로 외국의 패션 브랜드는 불황에도 잘나가고 있다. 프라다·아르마니·샤넬·보스·랄프로렌·캘빈클라인 등 수없이 많다. 싸지만 젊은 층에 먹히는 디자인으로 시장을 주도하는 회사도 있다. 유니클로·자라·H&M 등 패스트 패션업체다. 이렇게 많은 브랜드 가운데 한국인이 만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LA 출신의 장도원(57) 부부가 만든 ‘포에버 21’이 수년 전부터 빠르게 성장하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포에버 21은 뉴욕 타임스스퀘어 한복판에도 자리 잡고 있다.

 의류산업이야 말로 창의성이 성패를 가른다.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건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디자인과 시장의 흐름을 빨리 읽는 능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KAMA가 6년 전부터 디자인을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을 상대로 패션쇼 기회를 주고, 그중 우수 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앙일보 후원으로 지난 13일 맨해튼 요텔에서 열린 올해 행사에서는 이곳의 유명 패션스쿨인 FIT 출신들이 상을 휩쓸었다.

뉴욕 한인 의류업계의 오늘이 있기까지 터전을 다진 이가 있다. 박치근(73) 현 KAMA 상임고문이다. 80년대 초 봉제협회를 태동시킨 그는 3대에 걸쳐 회장을 지냈으며 지금도 정열적으로 뛰고 있다.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심상복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